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특별자치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입니다.

 

강원도의 역사를 보면, 1388년(공양왕 원년)에 대관령 동쪽지역인 교주도와 서쪽지역인 강릉도를 통합하여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로 신설. 개편하였다가, 1395년에는 강원도로 개칭되었습니다.


1395년 강원도의 수부를 원주로 정하여 강원감영을 설치하였고 200여 년 후인 1592년 임진왜란으로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소실되었으나, 1634년 원주목사 이배원이 재건하기 시작한 후, 여러 목사와 관찰사들이 계속 건설하였습니다.

 

강원감영은 선화당을 비롯하여 포정루등 40여 동에 달하는 웅장한 모습으로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간 강원특별자치도의 중심역할을 하였으나, 1895년 조선 8도 제도를 23부 제도로 개편함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1896년 이후 강원감영 건물은 원주 진위대 본부로 사용하였고, 1907년 진위대가 해산된 후에는 원주군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강원감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은 없어지고 선화당을 비롯하여 포정루, 내아 등 몇 동의 건물만 남게 되었습니다.

 

강원특별자치도와 원주시는 강원감영을 복원하기로 하고, 2000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2005년까지 선화당, 포정루, 중삼문, 내삼문, 내아, 행각 등 강원감영의 일부만을 복원하였습니다.(원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사진자료는 e뮤지엄, 원주시청, 원주역사박물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강원감영의 정문인 포정루이며, 조후선후기 관청대문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좌측의 골목길은 일제감정기 때 담장을 헐어서 만든 길로 보입니다.

 

조선후기에는 한때 관동포정아문(關東布政衙門), 대한제국 1905년까지는 선위루(宣威樓), 한국전쟁 이후에는 ‘강원감영문루(江原監營聞樓)’라는 현판이 달려있었으나 『여지도서』등의 문헌을 근거로 하여 1991년에 ‘포정루(布政樓)’로 고쳐 달았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지방행정관청의 문루에는 보통 아문(衙門)이라고 하였는데, 관동포정아문(關東布政衙門)이라는 원래의 현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포정루는 격이 약간 낮은 느낌이 듭니다.

 

▼ 조선8도 감영의 현황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황해, 함경, 평안)로 나누고 각 도(道)에는 관찰사를 두었으며, 관찰사(觀察使)가 근무하는 곳을 감영(監營)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아를 감영(監營)·영문(營門)·순영(巡營)이라고도 하며, 관원으로는 도사(都事)·판관(判官)·중군(中軍) 등 중앙에서 임명한 보좌관이 있고, 일반 민정은 지방민에서 선출된 향리(鄕吏)로 하여금 감영에 속한 이방(吏房)·호방(戶房 )·예방(禮房)·병방(兵房)·형방(刑房)·공방(工房)의 6방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관찰사는 지방행정의 최고책임자로, 감찰, 행정, 사법, 군사권(병영)을 함께 행사 하였으며, 임기는 조선초기에는 1년이었나 조선 후기에는 2년이었습니다.

감영에서 소요되는 비용은 관둔전(官屯田)등에서 충당되었고, 소속 노비는 450명 정도 였습니다.


조선전국8도의 감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강원감영(원주)
2) 경기감영(한양,서대문 근처)
3) 충청감영(충주)
4) 경상감영(상주, 1601년에 대구로 옮김)
5) 황해감영(해주)
6) 함경감영(함흥, 1600년 영흥으로 옮김)
7) 전라감영(전주)
8) 평안감영(평양)

 

관찰사(觀察使)란 무엇인가?
강원감영의 관찰사는 조선시대 지방장관으로 지금의 광역시장, 도지사와 같다.
고려시대 안찰사(按察使, 按廉使)의 후신인 관찰사는 왕의 명령으로 파견되어 강원도의 목(牧)과 군(郡)에 있는 많은 책임자가 올바르게 사람들을 잘 돌보고 있는지 살펴보는 역할을 했다.

17세기 초반까지 강원도관찰사는 원주목(原州牧)에 잠시 머물면서 1년의 임기동안 강원도 각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를 순력(巡歷)이라 한다.

여름에는 주로 영동지역인 강릉과 삼척에 들렀고, 다른 계절에는 춘천과 원주에 있었다. 이후 17세기 중반부터 관찰사의 임기는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나게 되고, 이 당시 선화당을 비롯하여 관찰사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집무실과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감사는 주로 원주의 감영에 머물면서 때때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순력했는데 이러한 변화를 유영(留營)이라고 부른다

- 원주역사박물관

 

▼ 복원된 원주감영의 안내도입니다. 다만 선화당과 주변건물만을 북원 한 것이며, 강원감영 전체의 복원은 자료의 부족과 이미 현대화된 도시로 인하여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현재 선화당과 일부 건물의 복원이 최선인 듯합니다

 

▼ 1912년에 찍은 사진으로, 강원감영의 중심건물들이 보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속절없이 파괴된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선화당만 남고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사진에서 보면 선화당의 후원에는 커다란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밖에서 내부를 보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객사가 보이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매우 아쉽습니다.

 

▼ 관동지에 그려진 강원감영의 배치도인데, 건물의 수는 대략 50여 개 정도였으며, 특이하게 읍성의 흔적은 없는데, 동, 서, 남, 북으로 문이 있었습니다.

 

▼ 강원감영의 선화당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이 복원되었을 때의 사진이며, 선화당 뒤를 보면 후원이 없는데 후원은 원주우체국이 이전하면서 복원되었습니다.

 

▼ 1895년 조선에는 감영의 직제가 없어지면서 강원감영에는 원주 진위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포정루의 현판은 선위루(宣威樓)로 바뀌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은 시기는 1905년 정도로 추정되는데, 문 안쪽에는 일본군 헌병이 보이고, 문주에는 "원주수비대"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 엽서로 발행된 포정루(선위루(宣威樓))를 나서는 일본군 헌병(원주수비대), 수비대들은 주로 의병들을 토벌하였습니다

 

▼ 감원감영을 접수한 일본군의 원주수비대가 훈련을 하는 모습입니다. 일본군의 수비대는 각 지방에 배치되었으며, 조선의병들을 토벌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습니다.

 

▼ 1900년대에 미국인 선교사 존스와 아펜젤러 일행이 찍은 사진으로 선위루(宣威樓) 현판이 달려 있습니다.

 

▼ 1950년대~1980년대 강원감영 포정루의 모습을 자료사진으로 잠시 보겠습니다. 포정루 앞에까지 도로였습니다(출처는 원주시청)

 

▼ 1980년대 전, 후로 보이는 사진이며, 포정루(좌측), 선화당(우측)이며, 선화당은 군청으로 사용되던 시절의 사진인 듯합니다.

 

▼ 포정루(布政樓)는 감영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출입문으로 ‘강원도에 부임한 관찰사가 정사(政事)를 잘 시행하는지 살펴보는 누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395년(태조 4) 강원감영을 설치할 당시 건립되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34년(인조 12) 강원감영을 복원할 때 재건되었습니다.

 

▼ 포정루의 1991년도의 모습입니다. 편액은 '강원감영문루'라고 되어 있습니다.

 

▼ 2022년 야행축제때의 포정루 모습입니다.

 

▼ 포정루 옆에부터 있는 행랑이며, 현재는 강원감영의 관리소의 부속건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포정루의 밑으로 출입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문은 조선시대에는 강원감영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을 가진 문이었을 것입니다.

 

▼ 포정루를 안쪽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세 개의 문중에서 두 번째 출입문인 중삼문(中三門)입니다.

 

▼ 중삼문(中三門)에는 관동관찰사영문(關東觀察使營門)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제  관찰사를 만나러 들어가 봅니다.

 

▼ 강원감영 관찰사 또는 원주목사의 선정비이며, 모두 17기입니다만, 아마도 무수히 많은 선정비가 세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 유실되거나 파괴되어서 현재는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지방수령들이 있었던 대부분의 고을에는 선정비, 공덕비, 영세불망비등으로 불리는 비석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실제 선정비를 받을만한 인물들은 극히 일부부분이며, 대부분 수령들의 선정비를 세우는 일은  의례적인 행사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 강원감영의 행각(전시관) 옆에 있는 옥사는 원래는 후원의 뒤편에 있었지만, 참고 삼아 행각 옆에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 조선말기에 몰아친 천주교박해의 광풍은 원주에도 예외 없이 불어 닥쳤습니다.

 

▼ 조선 8도 감영의 관찰사가 근무하는 곳은 전부 선화당(宣化堂)이라고 하였으며, 전국의 감영의 유적 중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강원감영의 선화당입니다

 
관찰사는 이곳 선화당에서 강원도에 속한 각 지역의 행정·조세·민원·군사훈련·재판 등에 대한 총괄적인 업무를 수행했으며, 선화당은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입니다.

 

 

▼ 선화당(宣化堂) 편액의 글씨는 최규하 전 대통령의 글씨입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원주 출신으로써, 강원도내의 여러 건물에 편액의 글씨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 1905년 정도로 추정되는 사진인데, 일본군 원주수비대가 주둔하던 강원감영 선화당이며, 편액은 운주헌(運籌軒)이 붙어 있습니다. 

 

1896년 강원감영이 춘천으로 옮겨가고, 대한제국군대, 원주진위대 (原州鎭衛隊)가 주둔하면서 선화당 편액은 운주헌으로 바뀌어 달렸습니다.

 

▼ 1910년 이후의 사진으로 보이며, '운주헌' 편액이 없어졌습니다.

 

▼ 마침 한지공예 작품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 관찰사의 임기가 1년 또는 2년 정도였는데,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대부분 관찰사는 홀로 부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 선화당의 뒤편이며, 작은 건물은 책방입니다.

 

 

▼ 선화당 뒤편에서 바라보는 후원의 모습입니다.

 

▼ 선화당에서 후원으로 드나드는 문이며, 관찰사는 이문을 통해서 후원에 가끔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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