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용주사는 1790년 2월 19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4월 15일에 상량, 9월 29일에는 대웅보전에 불상이 봉안되었습니다

대웅보전은 용주사의 주불전으로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지만, 외부 단청을 제외하고는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의 건물로 18세기 불전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웅보전은 2017년 이전에는 문화재자료였지만 2017년에 보물로 승격되었습니다.

 

▼ 대웅보전은 일제강점기때의 사진을 보면 계단등의 모습이 바뀐것 외에는 변함이 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 [자료사진:e뮤지엄]  일제강점기의 대웅보전입니다.

 

▼ 대웅보전의 글씨는 정조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나, 왕의 글씨를 보증하는 어필(御筆)의 글씨가 없어서 정조의 글씨라고 단정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 [문화유산채널]대웅보전-기둥머리 용(龍)머리 장식과 아름다운 단청.


▼ [자료사진:문화유산채널] 화성용주사대웅보전목조삼세불좌상 및 후불탱화입니다. 

 

▼ [자료사진:문화유산채널]대웅보전 닫집 - 삼세불과 후불탱화를 보호하는 용을 배치하였습니다.

 

▼ [자료사진:문화유산채널] 대웅보전 닫집의 죄,우에 있는 동자승의 비천상이며, 불단 상단에 있는 용은 불단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 [사진자료:문화유산채널] 대웅보전의 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가 그린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홍도가 그린 탱화는 처음 봅니다

 

▼ [자료사진:문화유산채널] 화성 용주사 후불탱화의 중앙은 석가모니불, 우측은 약사불, 좌측은 아미타불입니다.

 

※ 절집의 대웅전과 대웅보전은 어떻게 다른가? 

보통 절접의 본전(금당)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모셔져 있지 않고 양 옆으로 협시불이라고 하는 불상이 하나씩 더 있습니다.

 

- 용주사처럼 중앙에 석가모니불, 협시불로 왼쪽에 아미타여래불, 오른쪽에 약사여래불을 모시 있으면  '대웅보전'

- 중앙에 석가모니불, 협시불이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모시면 대웅전이라고 봅니다

 

▼ 화성용주사의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세불좌상은 장인 조각승이 만든것으로 보이는데, 어는 승려가 만든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자료사진:문화유산채널]중앙은 석가모니불, 우측은 약 사불, 좌측은 아미타불입니다.


▼ [자료사진:문화유산채널] 용주사 삼장탱화이며, 삼장은 천장(天藏)·지장(地藏)·지지보살(持地菩薩)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 세 보살의 법회를 동시에 한 화면에 도설한 것이 삼장탱화입니다.

 

▼ [자료사진:문화유산채널] 영단탱화(靈壇幀畵) ,영가의 극락왕생을 위한 신앙내용으로 묘사된 불화.

 

▼ 신중탱화(神衆幀畵) - 부처님 도량을 옹호하는 호법선신들을 묘사한 불화.

신중탱화는 법당의 좌우측 벽면에 봉안하는 불화이며, 묘사된 호법신(護法神)들은 부처님의 세계불법의 세계를 보호하는 신들입니다.

 

▼ 용주사 삼장보살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용주사 창건 시 조성된 불화들은 당대 최고의 화원과 화승들이 참여했는데, ‘삼장보살도’도 마찬가지이다. 민관(旻官)이 수화승이었으며, 돈평(頓平)·학인(覺仁)·처성(處性)스님 등이 함께 조성했다. 

 

민관스님은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화승으로, 용주사 불사 때 ‘삼장보살도’ 뿐 아니라 용주사 대웅전의 단청 도편수(都片手)로도 참여했다. 1794~1796년에는 화성성역(華城城役)에서 참여하는 등 국가에서 장인으로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삼장보살도는 정조가 용주사를 완성하고 거행하였던 수륙재(水陸齋)에 걸었던 불화이다. 수륙재란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불법(佛法)을 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이다.

 

수륙재는 중국 남북조 시기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며, 고려시대부터 왕실의 천도재, 가뭄과 기근 소멸 등을 기원하기 위해 거행됐다.971년 고려 광종 22년에 갈양사(葛陽寺)에서 수륙재가 개최됐다는 기록이 있다. - 경기도문화재연구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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