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정(四隱亭)은 용인 민속촌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역사유적이며, 정자 앞에 넓은 잔디밭이 있어서 가볍게 거닐기도 하면서 조선 초기 정암 조광조 선생을 비롯한 네 분 선비의 이력을 살펴보기도 좋은 곳입니다.

 

-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사은로 161(지곡동 615)
- 건립 시기 : 조선 초기
- 문화재 지정 : 용인시 향토유적 제50(2001.3)

※ 네분의 이름이 사적비에 새겨 있는데, 모두 기묘사화에 관련이 있으며, 조광조와 조광좌,조광보(형제간), 이자입니다. 조광좌와 조광보는 형제사이이며, 조광조와는 재종간(再終間;육촌사이)입니다. 이자는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함께 엮이었으나, 이후 용인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마치었습니다.

▼ 사은정의 입구에 들어서면 표지석이 보이고, 작은 주차장이 보입니다.

 

▼ 사은정을 찾아가는 길은 남부 컨트리클럽 삼거리에서 오일뱅크 옆길로 들어가다가 폭이 좁은 오르막길로 들어서면 됩니다.

 

▼ 사은정의 잔디밭 앞에는 기다란 사각돌로 세운 사은정 사적비가 보이는데, 2000년 6월 15일에 세워졌습니다

 

▼ 사적비의 각 면마다 이름과 간략한 생애가 각서 되어 있습니다.

 

▼ 사은정 사적비(四隱亭 四蹟碑)에는 사은정(四隱亭)의 건립에 관계된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 중의 한 사람인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선생, 중종 때 유학자로 식견이 높기로 유명하였던 방은 조광보(方隱 趙廣輔), 기묘명현의 회곡 조광좌(晦谷 趙廣佐), 그리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후손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정암 조광조와 같이 옥에 갇혔다가 화를 당한 음애 이자(陰崖 李耔) 선생들의 이름과 생전의 관직명들을 각서 하였으며, 각 면에는 사적비를 세우게 된 과정을 새겼습니다

 

▼ 정암 조광조 선생은 지금으로 보면 급진좌파로서 보수에 맞서서 국가를 혁신하려다가 중종과 보수파의 업어치기 한판에 38세에 짧은 인생을 살다 갔지만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개혁의 대표 아이콘인 사림파의 대표선비입니다.

 

 - 1750년 국오 정홍래 작 조광래 영정 -

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23일(음력 8월 10일~1520년 1월 10일(1519년 음력 12월 20일)는  한성 출생으로,  조선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며,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습니다.
전라도 능성(지금의 화순)에서 유배중 사약에 의하여 38세로 죽임을 당하였으며,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입니다.

 

조광조는 성리학만이 조선의 통치이념이라는 신념이 매우 강하여 중국의 도교를 숭상하는 소격서의 철폐를 강하게 추진하였으며, 특히 중종반정 때 마구잡이식 공신 등록에 따른 폐해를 주장하며, 반정공신들의 훈구파를 공격하여 중종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조광조는 과거에 합격 후에는 성균관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학습태도를 문제 삼으며 , 기강을 잡기 시작하였으며, 반정공신들의 거드름에 힘들어하고 이렇다 할 기반이 약했던 중종의 왕권에 힘을 더했지만, 급진적인 개혁으로 갈수록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던 반정공신들의 훈구파와, 이젠 조광조가 쓸모가 다 했다고 판단한 중종의 정치적 결탁으로 순식간에 조광조와 그 사림파를 숙청하였는데, 그것이 기묘사화입니다.

 

조광조가 성리학과 개혁사상으로 무장한 젊은 선비였지만 그 역시 정치적 기반이 약해서 중종의 보호 없이는 생존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고, 무조건 중종의 신임만을 믿다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중종이 하룻밤 사이에 전광석화처럼 사림파를 숙청했다는 것을 보면, 그동안 조광조는 중종이 어떤 마음이 가졌는지 전혀 낌새도 못 차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조광조가 중종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것처럼 보입니다.
중종은 어린 나이에 얼떨결에 반정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반정공신들이 반정을 반대한 신수근의 딸이니 내 치라고 할때에도 아무말없이 단경왕후의 왕비자리를 폐하고, 새 왕비를 들였던 왕이었습니다.

 

왜 한마디 말이라도 하고 싶었겠지만, 언젠가는 자신에게 힘이 생길 때까지는 기다릴 줄 았았던 꽤나 영리한 왕이었습니다.

조선을 좌지우지 하는 반정공신들에 둘러쌓여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는 껍데기 왕이었지만, 나름대로 정치판의 속성을 알아가면서 왕권의 힘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종에게 어느날 힘꽤나 쓰는 반정공신들을 하나씩 공격해서 쓰러 트리는 조광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호위장군처럼  보였고 중종은 조광조를 이용해서 훈구파들의 힘을 꺽어놓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약2년여 기간동안 그토록 자신을 위해 불철주야 개혁만을 생각하던 조광조였지만, 이제는 내 쳐야 할 정도로 부담이 심해졌던 중종은 한밤에 훈구파들만 모이도록해서 기습적으로 조광조와 사림파들를 숙청하여 버렸습니다.

 

이때 중종의 나이가 31살 때이므로 18세에 왕위에 올라 13년이나 지났으므로 버릴 패와 담아할 패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트렸다는 실세 조광조는 중중의 배신에 끝내 귀양지 전남 화순에서 사약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38세에...

 

조광조는 중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약을 받고 시를 한 수 남겼습니다

- 조광조의 절명시(絶命詩) -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이 하였고,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이 했노라.
白日臨下士(백일임하토)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昭昭照丹衷(소소조단충)  내 충성된 마음을 환하게 비추리라.

 

▼ 사적비에 새겨진 명문을 읽어 보면...

용인군수의 허가를 득하고 옛 모습 그대로 고증 설계된 건물이며 자금은 사은정(ㅁ)이 도로에 편입되어 보상금을 받아 대지 73.2㎡ 건평 29.9㎡를 건축하였으며, 당시 회장은 이석구, 총무는 조중묵, 중수기는 서하 임창순이 을유년 4월 근기 현판이 보존되고 있다...

이렇게 사적비는 시작되고 있고 날자는 2020년 6월 15일이고, 사은정을 다시 지었다는 내용입니다

 

▼ 조광좌(趙廣佐) _조광보와는 형제 사이이며, 조광조와는 재종간(육촌간)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계량(季良), 호는 회곡(晦谷)입니다.
1507년(중종2) 정묘년 식년시 생원 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 유생이 되었으며, 그 해에 박경(朴耕)과 김공저(金公著)의 옥사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습니다.

 

1518년(중종13)에 좌랑에, 1519년(중종14)에 지평에 올랐습니다. 이때에 “중종반정으로 인해 공신(功臣)으로 책봉된 자 중에 공이 없이 책봉되어 녹을 받고 있는 자가 매우 많으니, 지금 용단을 내려 가려내지 않으면 뒤에 폐단이 많을 것이다.”라고 간언 하기도 하였습니다

 

1519년 그 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발하자 조광조(趙光祖)의 붕당으로 몰려 관직을 잃었으며, 1521년(중종16)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매를 쳐서 죽임)당하였습니다.

 이때 조광좌의 나이는 28세였으며, 조광보(趙廣輔)가 친형입니다.

 

※신사무옥이란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를 두둔하였다는 혐의로 파직된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일으킨 옥사(獄事)이다. 안처겸과 이정숙(李正叔)·권전 등은 기묘사화로 득세한 심정(沈貞)·남곤(南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를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는데, 함께 참석했던 송사련(宋祀連)이 이 사실을 고변(告變)하여 안처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된 사건이다.

 

▼ 조광보(趙光輔) ; 조광좌가 친동생이며, 조광조와는 재종간(육촌간)

 

호는 방은(方隱). 연산군 때 임사홍(任士洪)이 권력을 장악하여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무인인 박영(朴英)에게 그를 참살(斬殺)하라고 권한 바 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1507년(중종 2) 참의 유숭조(柳崇祖), 호군 심정(沈貞), 전 승지 남곤(南袞) 등에 의하여 박원종(朴元宗)·노공필(盧公弼) 등을 해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의관(醫官) 김공저(金公著), 서얼(庶蘖) 박경(朴耕) 등과 함께 잡혀 국문을 당하였다.
대궐 마당에서 국문을 당하면서 옛 글을 소리 내어 외우다가 입회한 유자광(柳子光)에게 무오년에 현량(賢良)을 모함하여 죽인 소인이며 아첨하는 신하라고 매도하였고, 박원종에 대하여서도 폐주(廢主)의 나인을 첩실로 거느리고 있음을 힐책하였다.


결국 장형(杖刑)을 당하자 통곡을 그치지 않아 박원종 등으로부터 광인(狂人)으로 인정되어 석방되었다. 식견이 고명하였으나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스스로를 감추었다는 평을 들었다._한국민족대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이자(李耔)는 본관이 한산(韓山) 이 씨이며, 호는 음애(陰崖)이고 이색(李穡)의 후손입니다.

이자는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양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한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했으나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습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참화를 입게 되자 이자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숙청되었습니다. 그 뒤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살다가 용인에서 여생을 마쳤습니다._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사은정을 중수한 기록 안내판인데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 넓은 잔디밭 뒤에 소나무가 우거진 숲 속의 움푹한 곳에 자리 잡은 사은정입니다.

 

▼ 사은정은 기묘사화(15919)가 일어나기 전부터 지어진 것으로 전하며, 성리학의 대가였던 정암 조광조를 비롯해 방은 조광보, 회곡 조광좌, 음애 이자 등이 모여 친우를 맺으며 학문을 논하였던 정자라고 합니다.

 

사은(四隱)의 뜻은 밭 갈고, 나무하고, 낚시질하며, 나물 캐는 네 가지[경(耕)·신(薪)·조(釣)·채(菜)]를 낙으로 삼겠다는 의미라고 하며, 지금까지 여러 차례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현판으로 걸려 있습니다.

 

▼ [자료:용인시민신문]  자료사진에서 보면 사은정이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다릅니다. 세 칸 전부 방으로 되어 있는 모습인데, 1957년에 찍은 사진입니다.

 

▼ 사은정(四隱亭)은 전서체로 쓰여 있으나, 누가 언제 썼는지는 낙관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고쳐지을 때 만들어진 현판으로 보입니다.

 

▼ 사은정(四隱亭)에서 바라보이는 지곡동 방향이며, 지곡동은 음애 이자의 본향이었습니다

 

▼ 정자 내부는 마루를 깔았는데, 옛 사진을 보면 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언제 구조가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정자 뒤편에서 보면 굴뚝이 보이고, 여닫이 문짝이 달려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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