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정은 용문면 소재지에서 44번 도로를 따라 횡성군 방향으로 3.5㎞ 지난 오른쪽 길가에 위치하는데, 서쪽의 산자락이 동으로 길게 뻗어 흑천(黑川)과 마주친 절벽 위에 정자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봉항정과 택승정은 남원양씨들에 의해 건립이 되었는데, 남과 북으로 4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봉황정이 처음 건립된 것은 인조 2년(1624) 남원양씨 용문면 입향조인 양응청(梁應淸)과 그의 사촌인 양응함(梁應涵)에 의해서였다. 그 뒤 66년 후인 정조 14년(1791)에 후손들이 중건하였으나, 철종 1년(1850)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다시 1967년에 남원양씨 종중에서 옛 규모대로 복원하였다._양평문화원 자료입니다

▼ 홍천으로 올라가는 길 바로 옆에 봉황정의 삼문입니다. 봉황정 편액의 글씨는 서예가이신 상산 신재석(常山 申載錫)선생의 글씨인데, 택승정 편액의 글씨도 상산 신재석 선생이 썼습니다.

 

▼ 카카오 지도에서 봉황정의 삼문을 보는 모습입니다. 문은 잠겨 있으며, 문 옆으로 들어가는 공간이 있습니다

 

▼ 양평 용문면의 광탄리의 남원양씨들이 세운 봉황정과 택승정의 거리는 약 4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같은 정자이기는 해도 서로 용도가 달랐다는데, 택승정은 활을 쏘면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고, 봉황정은 선비들이 글을 읽거나, 시를 쓰면서 경치를 즐겼던 곳이었습니다. 

 

▼ 문 옆으로 봉황정으로 올가면 커다란 정자를 만나는데, 봉황정이라는 현판은 달려 있지 않습니다. 지금 보는 것은 정자의 뒷면입니다.

 

▼ 양평문화원의 자료에서 봉황정에 대한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봉황정은 부근에 남원양씨 집안의 활터인 택승정과 짝하여 건립이래 남원 양씨 집안과 이 고장 선비들이 학문을 교유하는 곳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여기에서 양헌수(梁憲洙, 1816~1888)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이 양성되었다. 

 

또한 당대의 명인들이 시와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지평에 은거하였던 이식(李植, 1584~1647), 명시인 유희경(劉希慶, 1545~1636), 대학자 김창흡(金昌翕, 1653~1722), 한말의 재상 이중하(李重夏, 1846~1917) 등이 봉황정에 올라 그들의 회포를 글로 남겼다. 

 

이중 「봉황정」이라는 제목으로 이항복, 유희경, 김창흡의 작품이 있고 『봉황청풍(鳳凰淸風)』이라는 제목의 양창석(梁昌錫)의 시와 『봉황대지평(鳳凰臺砥平)』이라는 임숙영(任叔英)의 시가 전한다.

 

▼ 정자의 내부에는 람휘정(覽輝亭)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람휘(覽輝;볼람, 빛날휘)는 봉황이 천리길을 날아가다 덕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내려앉았다는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합니다.

 

▼ 정자 안에서 보면 수많은 시를 새긴 편액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만큼 봉황정의 경치가 끝내주게 좋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시를 쓴 편액을 보다가 백사 이항복의 시편이 보이길래 골라 보았습니다. 이항복이 시를 쓴 시대가 살기 좋은 태평성대라고 표현을 하고 있으며, 봉황을 기다리는 마음을 시로 썼습니다

 

▼ 봉황정에서 바라보이는 백사장은 흑천이며, 지금은 나뭇잎에 가려서 흑천이 잘 안 보입니다

 

▼ 봉황정의 앞, 흑천에서 바라본 봉황정인데, 숲에 가려서 안 보이네요!... 직접 가서 찍지는 못했지만, 포털 지도에서 보니 참 세상 좋아졌습니다. 안 가봐도 컴퓨터 앞에서 다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 정자 앞에서 보니 현판이 또 바뀌어 있습니다.

 

▼ 서쪽의 산자락이 동으로 길게 뻗어 흑천(黑川)과 마주친 절벽 위에 정자가 건립되어 있는데, 이러한 지형적인 모습은 봉황정의 다른 이름인 구성대(九成臺) 혹은 남휘정(覽輝亭)에도 반영되는데 여기에서 「九成」은 태평성대가 아홉번 이루니 봉황이 와서 춤추는 형상이라고 합니다_양평문화원

 

▼ 한 여름에 장자에 앉아 보면 시 한구절이 떠 오르고도 남을 멋진 정자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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