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수원에서 1시간 10여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볼거리 많고, 쌀이 좋기로 유명한 고장 입니다. 한문으로 보면 麗州는 아름다운 고을이라는데 여주에는 8가지의아름다운 경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신륵사의 경치인줄 알았더니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녘 종소리(神勒暮鍾(신륵모종) 라고 하는데 참으로 운치있는 말입니다.
▼ 신륵사의 강월헌 옆에 있는 3층 석탑입니다. 오랜 기간의 비바람에 탑신의 모습은 많이 훼손되어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 입니다.신륵사3층 석탑은 강변의 암반에 위치해 있으며 고려시대말 유명한 고승(나옹혜근)의 다비(茶毘)식 이후에 그분의 덕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탑을 보면 여느 절의 탑과는 다르게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고즈넉한 분위기가 세월의 시공을 넘어서 아주 먼 옛날 고려시대로 돌아가서 있는듯 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는 모습입니다.
▼ 신륵사는 여주IC에서 15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 신륵사에 가려면 통과해야 하는 신륵사관광지 입구입니다만, 문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 평일에 와서 그런지 관광지는 한가 합니다. 여기서 여주8경을 알아봤습니다
1. 神勒暮鍾(신륵모종) -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2. 馬巖漁燈(마암어등) - ‘마암 앞 강가에 고기잡이배의 등불 밝히는 풍경’
3. 鶴洞暮煙(학동모연) - ‘강건너 학동에 저녁밥 짓는 연기’
4. 燕灘歸帆(연탄귀범) - ‘제비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5. 洋島落雁(양도낙안) - ‘양섬에 기러기떼 내리는 모습’
6. 八藪長林(팔수장림) - ‘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7. 二陵杜鵑(이릉두견) - ‘영릉과 녕릉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8. 婆娑過雨(파사과우) - ‘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
▼ 훈민정음의 모음,자음을 예술적으로 배치해서 설치미술 작품으로 잘 만들어 놓았군요!!!
▼ 도자기 판매점이 모여 있는 곳인듯 한데 공간 부분은 공원으로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 여주는 인근의 광주,이천 지역과 더불어 도자기가 유명한 곳 입니다. 도자기를 판매하는 가게를 마치 도자기를 굽는 가마 처럼 디자인 하였군요 !!!
▼ 공원 처럼 잘 꾸며져 있는데 사실은 영월공원이라는 이름이 있으며 여느 관광지처럼 왁자지껄 시끄럽지 않게 상가와 신륵사의 중간 지점을 완충 녹지로 만든것이 좋아보입니다
▼ 화장실을 도자기처럼 만들었는데 외곽 오염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모양입니다.
▼ 신륵사로 가는길에 물레방아도 볼겸 잠깐 쉬어 가기로 합니다
▼ 시민들이 하루 놀러와도 좋을만큼 조용합니다, 물론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정이 다르겠지만요 !!!
▼ 학생들이 많은데 신륵사는 예전 부터 학생들이 봄,가을로 소풍을 많이 다녀가는 곳이었답니다.
▼ 신륵사로 들어 가기전에 세워져 있는 "원호장군임진전승비(元豪將軍壬辰戰勝碑)입니다. 여기서 원호장군과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인 내용을 공부하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봤습니다. 먼저 전승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그대로 옮겨 봤습니다
원호장군(1533 - 1592)은 원주 원씨로 여주에서 태어난 조선중기의 무신이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고 있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분연히 일어나 패주하는 관병과 민병등 300여명을 규합하여 신륵사의 팔대숲 일대에서 도강을 기도한는 왜병을 섬멸하고 구미포(龜尾浦) 집결한 왜적을 새벽에 기습하여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같은 여강일대에서의 전투는 무인지경으로 북진하던 왜적을 육전(陸戰)에서 격파한 최초의 대승이었으며 국위를 선양하고 실추된 국민의 사기를 진작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후 그는 여주목사 겸 경기, 강원 양도방어사로 임명되었고 강원도로 전임하여 금화에서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후에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다. |
▼ 조용한 영월공원의 모습입니다.우측으로 꺽어들면 신륵사 일주문입니다.
▼ 일주문 앞에 왔지만 문을 막아놓았습니다. 절에 들어갈때 일주문으로 들어갈때의 마음은 좀 특별했는데... 공사중이라니 아쉽지만 강변길로 돌아갑니다.
▼ 조포나루는 조선의 4대 나루터중의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았지만 여주,이천 지역의 경제전초기지로써 그 역활은 지대하였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현재의 위치는 신륵사 입구 강변에 있는 황포돗대나루터입니다 위령비는 1963년 안양남초등학교 학생들과 학부모, 인솔교사등 49명이 배가 뒤집히는 대 참사로 목슴을 잃은데 대한 위령비입니다. - 조선4대 나루터는 마포나루,광나루,이포나루,조포나루 입니다.
▼ 신륵사 조포나루 건너편의 황포돗대 선착장입니다만, 운행을 하지 않는것으로 보입니다.
▼ 무슨 루(樓) 인지 현판이 안보입니다. 단청칠만 잘하면 아주 그럴듯 할것으로 보입니다만, 원래 부터 있었던 건물이 아니고 최근에 세워진 건물로 보입니다.
▼ 여러가지 비입니다. 왼쪽은 여주신륵사 사적비, 중앙은 인류화합공생소원비, 우측은 신륵사 중건 공적비입니다만, 가운데의 인류화합공생소원비는 일본인 불교신자들과의 인류화합과 공생을 을 소원하는 비인것 같은데 일본놈들하고 화합이 될까요???
▼ 신륵사는 나즈막한 산 허리에 기대어 강을 바라보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절입니다. 일주문에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라는 현판이 있는데 사실 봉미산 정상은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한자 그대로 봉황의 꼬리부분에 있는 절입니다.
▼ 절의 앞 부분이고, 정갈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대웅전인 극락보전은 보수공사중이기에 완전한 모습은 아닙니다.
▼ 관음전입니다만 아마도 새로 신축한 건물인듯 깨끗합니다. 말 그대로 관세음보살을 모신불전입니다.
▼ 범종각입니다. 범종각에는 범종,목어,운판이 비치됩니다. 보통 단층일때는 범종각, 2층일때는 범종루라고 한답니다.
▼ 신륵사의 조사당(祖師堂)입니다. 내부에는 벽변에 좌측에 지공(指空) 중앙에 나옹(懶翁) 우측에 무학(無學)의 영정이 걸려 있습니다. 조사당(祖師堂)은 사찰 안에 종파를 연 조사(祖師:창건주 또는 스승)를 봉안한 절집(당우)으로, 조사전이 없는 사찰에는 영각(影閣)을, 국사를 배출한 사찰에서는 조사전 대신 국사전(國師殿)을 짓기도 한답니다.
▼ 수령이 600년이나 된 향나무입니다. 600년 전이면 고려말쯤 되겠네요...
▼ 명부전입니다. 참으로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 당우(堂宇:절집)입니다. 명부(冥府)란 염라대와이 다스리는 유명계 또는 명토(冥土)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랍니다.
고려시대때 까지는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지장전과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시 시왕전[十王殿]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지장전과 시왕전을 합한 형식의 명부전으로 결합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시왕은 생전에 지은죄와 선행을 구분하여 판결하는 10명의 왕이며 염라대왕은 5번째의 왕입니다,
▼ 어느 절에나 다 있는 삼성각입니다. 불교가 이땅에 토착화 할때 토속신앙이 불교신앙과 합쳐지면서 삼성신앙이 생겼다고 합니다. 불교 사찰에서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데 산신은 산신령에 해당하고, 칠성은 북두칠성을 의미하며,독성은 나반존자를 읨한다고 합니다.
▼ 조사당 뒷편의 소나무가 마치 예를 갖추는듯 합니다.
▼ 부도 입니다.고승의 다비식 후에 사리를 수거해서 별도로 모신 사리 보관탑입니다
▼ 부도에도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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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들의 선원으로 이용되는 적묵당(寂默堂) 입니다
▼ 스님들의 숙소인 요사채로 보입니다
▼ 다층석탑 왼쪽에 있는 건물인데 적묵당 입니다. 신륵사의 다층석탑은 화강암이 아닌 대리석이라 특이합니다.
▼ 구룡루인데 루(樓)라고 하기에는 높이가 너무 낮은것 같습니다. 지금은 대웅전인 극락보전이 수리중이기 때문에 구룡루가 임시 대웅보전 역활을 합니다.
▼ 다층석탑 오른쪽에 위치한 심검당(尋劍堂)입니다. 뜻을 풀어 보면 지혜의 칼을 찾는다라는 말이랍니다.
▼ 명부전이 보이는 너른 마당
▼ 적묵당 뒷편의 특이한 연도(굴뚝)를 봤습니다. 옛날식 구들 대신 가스난로의 연통을 만들면서 굴뚝에 항아리 반쪽 모양으로 처리를 하였습니다.
▼ 신륵사의 은행나무 입니다 수령은 약 60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 크기가 업청납니다
▼ 수령 600년의 향나무와 조사당
▼ 여기에도 수령이 꽤 되는 향나무가 있군요
▼ 세심정... 참 좋은 말이기는 한데 ... 흐르는 물가에 세워져 있으면 세심정이라는 말이 더 뜻이 있을것 같은 느낌이 옵니다.
▼ 멀리서 보면 참으로 아담한 모습입니다. 세심정은 현판이 앞뒤로 두개인데 뒷편은 청자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다층전탑으로 가는길에 "김병익공덕비를 잠시 바라봅니다. 신륵사를 중건할때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분인듯 합니다
▼ 강월헌 뒷편에 서 있는 다층전탑입니다 . 기단은 화강암으로 받치고, 탑신은 특이하게 벽돌로 쌓았습니다. 그래서 신륵사를 다른 말로 벽절이러고도 불리었다고 합니다.
▼ 대장각기비각입니다. 원래는 각루가 없었으나 비를 비바람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각루를 세운듯 합니다. 옛날에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는데, 이비는 대장각을 조성하게된 제반사항을 기록한 석비인데 지금은 명문이 대부분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다고 합니다.
▼ 비가 많이 깨져서 명문이 마멸되었지만 어느 정도는 글씨는 확인하였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다층전탑에서 내려다 보는 여강입니다. 남한강 물길입니다만, 여주를 지나는 강이기에 여강이라고 했는지 강이 아름다워서 여강이라고 했는지 아뭏든 여주사람들은 여강이라고 합니다. 강 건너편 보트장은 옛날에는 금빛모래가 반짝였던 강변 놀이터였습니다만, 지금은 여주보가 생기면서 금은빛모래밭이 없어졋습니다.
▼ 아담하고, 강가에 한적하게 세워진 3층석탑은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탑 앞에서 합장하고 마음을 비우면 해탈이 따로 없을것 같습니다.
▼ 여강의 강가에 나란히 세워진 강월헌과 3층석탑입니다. 현재의 정자는 1972년 홍수때 떠내려가서 1974년 콘크리트로 다시 세운 정자입니다.강월헌이라는 정자의 이름이 특이합니다 보통은 ㅇㅇ정, 또는 ㅇㅇ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야 하는데 전각의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강월헌이 세워진 내력을 찾아봤습니다.(여주군史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원래 강월헌은 보제존자 나옹(1320~1376)의 처소 이름이자 당호였다.
나옹은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 형원사로 가는 도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옹이 신륵사에서 입적하고 난 뒤 제자들이 유지를 받들기 위해 사리탑과 영당을 세운 것이다.
보제존자 나옹의 영당이 맨 처음에는 강월헌이었던 것 같다. 이후 지공·나옹·무학을 모시는 조사당(祖師堂)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나옹은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 형원사로 가는 도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였고, 실제 신륵사에서 머문 기간이 며칠 되지 않는다.
따라서 강월헌은 양주 회암사의 나옹의 생전 처소였던 강월헌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강월헌은 전각의 형태로 있다가 이름이 없어진 뒤 강가에 만들어진 정자의 이름으로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제 신륵사를 나섭니다. 버팀목으로 받쳐놓은 소나무는 위태롭게 보이기는 하지만 운치는 있어 보입니다.
▼ 옛날의 조포나루 근처에는 황포돗단배를 타볼수 있는 선착장이 있습니다. 평일이라 그런지 손심은 아무도 없군요
▼ 원래는 북내면 신접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2003년 6월 세종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였고 이후 신륵사 관광단지로 이전하여 복원 전시하고 있답니다. 신접리는 여주 신륵사의 북쪽 방향에 있는 여강의 지류인 금당천 부근의 마을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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