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 계곡의 화양구곡중에서 4곡 금사담(金沙潭)위에 아주 멋진 정자가 앉아 있는데, 암서재(巖棲齋)이며, 바위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풀어 봅니다
절벽위 바위 사이에는 노송이 울창하고, 밑으로는 맑은 물이 감도는 금사담과 더불어 더할 수 없는 경치를 보여주고 있는 곳 입니다.
이 암서재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만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여 화양동에 은거할때 학문을 닦고,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 암서재는 기가 막힌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수많은 정자를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풍광이 좋은 정자는 그리 흔치 않았습니다.
암서재기(岩棲齋記)에 의하면 ''尤庵先生於丙午年間築精舍於溪南 ;우암선생어병오년간축정사어계남)''이라고 씌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666년(현종 7) 8월에 암서재를 지었고, 거주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1966년이면, 우암 송시열 선생이 60세 즈음이 되는데, 그 당시에 정자의 이름은 단순히 정사(精舍)라고만 한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암서재에 걸려 있는 우암 송시열의 시 "華陽洞巖上精舍吟 ; 화양동암상정사금)"라는 시를 통해서 보면, 처음에는 암서재라는 정자의 이름이 없이 그냥 정사(精舍)라고 하였습니다.
▼ 암서재 아래 바위면에 새긴 글씨는 금사담(金沙潭)이며, 송시열 선생의 제자 권상하가 명명하였고, 단암 김진원이 쓴 글씨를 바위에 새긴 것입니다.
밑에 보이는 충효절의(忠孝節義)의 글씨는 조선에서 명나에 갔던 사신이 명나라 태조의 글씨를 받아 온 글씨를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암서재(巖棲齋) 편액은 1689년 우암이 사사(賜死)된 이후 정사(精舍)가 무너진 채 방치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청주목사 김진옥이 정사(精舍)를 다시 짓거나 수리를 하면서, 송시열 선생의 제자 권상하에게 부탁하여 `암서재(巖棲齋)'라는 편액의 글씨를 받아서 1721년(경종 1)에 걸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처음에는 그냥 정사(精舍), 또는 소재(小齋)라고 하였다가, 우암 송시열이 죽은 후 32년 후에 정식으로 `암서재(巖棲齋)'라는 이름을 달았습니다.
▼ 우암 송시열 선생은 43세(1649년(효종 1년))에 처음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는데, 그 이후로 무수히 관직에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말년에 60세 즈음에 고향인 충북 옥천을 떠나 화양동에 들어 왔으며, 1689년(82 세)에 사약을 받고 죽을 때 까지 화양동 계곡을 사랑하였습니다.
▼ [사진자료:한국관광공사] 암서재를 어떻게 들어 가는 길이 있는지를 몰라서, 자료사진으로 좀더 자세하게 보겠습니다.
▼ 암서재는 목조건물의 특성상 수시로 보수하거나 다시 짓기를 여러번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자료에서 보면, 청주목사 김진옥(鎭玉)이 1715년(숙종 41) 정사를 중건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에 후손들이 수리하였고, 1970년, 1986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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