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은 1849년(헌종 15) 신양면 전주이씨 집안의 이철수(李喆洙)선생이 후손들의 공부를 위해 세운 정자이며, 정자의 편액(編額)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라고 합니다

 

※ 주소는 충남 예산군 신양면 서계양리 107번지 (일산이수정)

 

▼ 화산천(달천)과 신양천(죽천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바라보는 일산이수정입니다. 정자(亭子)가 별로 없는 예산지역에서는 귀한 정자(亭子)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포털의 지도서비스에서 일산이수정의 위치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 ~ 아래서 추사 김정희가 일산이수정이라는 글씨를 써 주었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일산이란! 아마도 일산이수정앞에서 바라 보이는 작은 동산을 1산으로, 동산 위로 화산천과 신양천을 2수(二水)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안내문에서는 화산천을 달천으로, 신양천을 죽천천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료사진]

 

▼ 일산이수정 아래에서 보면, 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주위가 잘 보입니다

 

▼ 안내문이 너무 구석진 곳에 있습니다

 

▼ 일산이수정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사진으로 보면 잘 안 보여서 다시 글씨로 옮겼습니다

예산일산이수정(禮山一山二水停) - 충청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예산 일산이수정은 전주 이씨 가문의 이철수(1824~1896)가 1849년(현종15)에 지은 정자이다.전주 이씨 집안의 자녀교육을 위한 서당으로 알려져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일산이수정이라는 이름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지었으며, 앞면에는 김정희가 직접 글씨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에서 9년 만에 풀려난 이듬해에 며칠간 이곳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때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썼다고 한다.

일산이수정은 예산군 대술면의 *달천과 청양군 운곡면의 *죽천천이 만나는 지점의 작은 동산 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러한 주변 지형지세를 보고 ‘산 하나와 물길 둘’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김정희는 단순한 글자인 ‘일一’과 ‘산山’은 세로로 한꺼번에 써서 뒤의 복잡한 글자인 정(亭)자와 균형을 고려하였다.

20세기 들어 일산이수정은 신교육을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20년경에는 국문강습소가 개설되었고, 1923년에는 현 신양초등학교의 전신인 신양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쓰였다.

일산이수정은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하여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이자 한 집안의 교육을 맡은 장소였으며 근대 초기 공교육의 장소로도 쓰였다는 점에서 예산 지역 교육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달천(화산천)
*죽천천(신양천)

 

▼ 옆에서 보면 난방을 하기 위한 구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일반적인 정자(亭子)가 아닌, 정사(精舍)로 보입니다. 고정적으로 기거(起居) 하지는 않지만, 가끔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공부를 하는 등에 이용하는 건물이었습니다.

 

▼ 삼면이 훤희 보이는 높은 곳에 정자를 지었습니다. 

 

▼ 이 정자는 신양면에 사는 전주이씨 가문의 이철수선생이 처음부터 개인적인 정자가 아닌 후손들의 공부를 위하여 공부방이 딸린 건물을 지었다고 하며, 1920년경에는 국문강습소가 개설되었고, 1923년에는 현 신양초등학교의 전신인 신양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쓰였다는 것을 보더라도, 처음부터 공부방에 목적을 두고 건물을 만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물의 상태를 자세히 보면 마루 양쪽에 창호가 달려 있는데, 아마도 마루 앞에 창호가 달려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 편액(編額)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썼다고 하는데, 글씨 끝에는 노과(老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노과(老果)는  김정희선생의 호입니다

 

김정희 선생의 호는 수십개나 된다고 하는데, 주로 완당(阮堂)이나 보담재(寶覃齋)라고 하였으며, 추사(秋史)라는 쓰지 않았습니다만, 어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추사(秋史)가 김정희의 호(號)가 되어 버렸습니다.

 

김정희가 24살때 아버지를 따라서 청나라에 갔었는데, 이때 청나라 관리들과 필담(筆談)을 나눌 때, 자신의 이름은 김정희, 자(字)는 추사(秋史)이며, 호(號)는 보담재(寶覃齋)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字)가 호(號)가 되어 버린것입니다.

 

옛날에는 아기가 태어나면 아명(兒名)을 지어 주는데, 이름을 정희(正喜)라고 하였으며, 성인이 되면 지어 주는 이름인 자(字)를 추사(秋史)라고 하였으며, 선비들이 보통 다른 사람들이 불러주기 좋은 이름을 만드는데, 그 이름을 호(號)라고 하며, 김정희는 자신의 호를 보담재(寶覃齋)라고 만들었습니다.

 

▼ 19세기에 '허유'가 그린 김정희의 초상화이며, 오른쪽에 완당선생초상(阮堂先生肖像) 글씨가 있어서 김정희선생의 초상화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완당(阮堂)은 김정희선생의 호(號)입니다.

 

▼ 일산이수정에서 바라보는 산(봉우리) 뒤로는 화산천(달천)과 산양천(죽천천)이 만나는 곳입니다

 

▼ 전주이씨 아동들이 마루에 앉아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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