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입니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였습니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 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 이었습니다. - 출처는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입니다

 

▼ 경복궁의 흥례문 주위의 안내도 입니다

  흥례문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을 때 흥례문을 없애버리고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습니다.

 

광복이 되고 나서도 조선총독부 건물은 그대로 이 자리에 있었고 정부청사로도, 박물관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1995년, 마침내 우리 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흥례문을 복원하였습니다.

 

이 문에는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우리 국민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경복궁의 전각중에 일제에 의해 가장 크게 수난을 당했던 흥례문입니다. 흥례문은 1395년(태조4년)에 창건되었으며, 원래 문이름은 홍례문(弘禮門)이었는데, 1867년(고정4년)에 중건될때 흥례문(興禮門)으로 바뀌었습니다.

 

  흥례(興禮)는 예을 일으킨다라는 의미인데, 조선의 유교적인 다섯가지 덕목(仁,義,禮,智,信)중에서 남쪽을 의미하는 예(禮)를 넣어서 흥례문이라고 하였답니다. 한양도성의 숭례문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1996년에 조선총덕부 건물을 걷어내고 2001년 새롭게 중건된 흥례문의 장엄한 모습입니다. 또한 일제에 의해 사라져 버린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도 복원계획에 의해 다시 지어질 것입니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좌/우 행각에는 동서로 각각 출입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서쪽에 있는 문이 용성문(用成門)입니다. 용성문은 왕이 궁궐의 서쪽에 있는 영추문이나 북쪽의 신무문으로 나가려 할 때 이용했던 문이라고 합니다.

 

 우측에 있는 문은 협생문(協生門)이며, 세자가 동궁에서 광화문 밖으로 나갈때 주로 이용했던 문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동쪽의 주차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수문장 교대식때 수문군들이 드나드는 곳 입니다.

 

 문앞에 보이는 큰 북은 수문장 교대식때 두두리는 엄고라는 북입니다. 처음 울리는 북소리는 초엄, 두번째 울리는 북소리는 이엄, 세번째 울리는 북소리는 삼엄이라고 합니다 

 

  경복궁의 흥례문에 들어서면 돌을 깐 길이 3개로 나뉘어 있는데, 약간 도드라진 가운데 길은 임금님만이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임금이 아닌 자가 이유 없이 이 어도 위를 걸어가면 매 80대를 맞았다고 합니다. 

 

돌다리 밑으로는 물이 흐르는데 이 물을 ‘금천’이라 불렀습니다. 금천의 ‘금’은 ‘금지한다’, ‘삼간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궁궐에는 금천과 금천교가 있는데.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라 합니다. 

 

영제교 밑에는 특이하게 생긴 동물이 네 마리가 있는데, 천록이라고 하며   궁궐에 들어오려는 사악한 기운을 막는 것이 이 녀석들의 임무입니다.

 

  이문은 근정전으로 향하는 근정문입니다. 이 문 앞에 있는 계단은  답도라고 하며 임금님은 가마를 타고 이 답도 위를 지나갔습니다. 답도에 새겨진 새는 바로 봉황입니다. 봉황은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새라고 합니다.

 

 근정문앞의 영재교에서 좌우로 보면 좌측에는 유화문(維和門)이 있고 우측에는 덕양문(德陽門)이 있습니다. 유화문은 궐내각사의 관원들이 출입 할 수 있도록 만든 문이라고 합니다.

 

문 오른쪽에 보면 조그만 건물이 붙어 있는데 기별청(奇別廳)인데, 기별청의 임무는 승정원에서 그날 그날의 일을 적어서 알리는 관보를 작성하던곳이었다고 합니다.

 

 유화문 옆의 기별청을 당겨 보았습니다. 청(廳)이라고 하기에는 좀 작지만, 하는 일은 엄청 중요한 일을 하는 곳 이 었습니다

 

 근정전 밖에서 보는 유화문과 기별청입니다

 

  근정문 좌/우 아래에 작은문이 하나씩 있는데, 일화문(동쪽)과 월화문(서쪽)입니다. 월화문은 무반(武班)들이 정전(근정전)으로 출입하던 문이었습니다.

 

  일화문은 근정문의 오른쪽에 있은 문으로 문반(文班)들이 출입하던 문이었습니다.

 

 근전문을 통과하면 근정전앞에 서게 됩니다.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입니다. 근정전 앞에 두 개의 기단이 보이는데, 이것을 ‘월대’라고 합니다. 이 곳에는 서른여섯 개의 동물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임금님의 공간에 사악한 기운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수호병 역할을 하지요. 지붕 위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손오공 일행들이 근정전을 지키고 있는데요, 잡상이라고도 불린답니다. 여기 있는 동물들은 모두 쌍쌍입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자손이 번성하라는 뜻이지요. 근정전 기단 위에는 무쇠그릇이 놓여 있는데 ‘드므’라고 합니다. 드므에는 늘 물을 담아 두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 남산에 불귀신이 살았는데, 얼굴이 아주 흉측하게 생겼답니다. 한번은 불귀신이 경복궁에 불을 내러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 혼비백산 달아났다고 합니다.

 

목재건물은 불이 나면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화재가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이곳에 드므를 두었던 것입니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은 정치를 부지런히 한다라는 의미이고, 정도전이 작명하였다고 합니다.

 

 근정전 앞의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왕들의 즉의식이나, 세자의 책봉식, 사신맞이 행사, 과거시험등 여러가지 궁중의 행사들이 열렸던 장소 입니다. 

 

 근정전의 서쪽 행각에는 무엇에 쓰는지 알 수 없는 사다리가 있고 벽에는 방이 있는듯이 문이 잠겨 있습니다. 무슨 사다리인가? 긍금헸는데 알아보니 근정전의 동쪽행각과 서쪽행각 중간에 누각을 만들었는데, 동쪽 누각은 융문루(隆文樓), 서쪽 누각은 융무루(隆武樓)라고 합니다.

 

융문루와 융무루는 왕과 왕세자 궐내각사의 신료들이 보던 책을 보관하는 곳 이라고 합니다. 서쪽의 융무루는 막혀 있고, 동쪽의 윰문루는 누각 밑으로 통행이 가능 합니다.

 

 융무루를 행각 밖에서 담아 보았습니다만 막혀 있고, 동쪽의 행각에도 동일한 누각(융문루)이 있는데, 동쪽의 누각 밑으로는 현재 드나드는 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근정전의 동쪽에 있는 융문루(隆文樓)이며, 서쪽에 있는 융무루(隆武樓)는 누각 밑으로 통로가 없는데, 융문루는 누각 밑으로 통로가 있어서 동궁쪽으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만, 여러 자료에 보면 누각밑으로 통로가 있는것이 맞다, 통로가 없이 막힌 것 이 맟다라는 상반된 자료가 있기는 합니다.

 

신빙성이 있는 자료는 원래 일화문과, 월화문이 근정전 좌,우의 행각에 있었는데, 고종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일화문과, 월화문을 근정문의 좌,우로 옮기면서, 동궁으로 드나드는 문이 필요해짐에 따라, 융무루의 누각밑에 담장을 허물고 문을 내었다라는 자료가 맞는 것 같습니다. 누각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는데, 과연 정도전 다운 생각입니다.

 

  근정전 앞의 계단에는 월대로 올라가는 가운데 계단에는 답도라는 봉황이 새겨진 판석이 놓여져 있습니다. 답도는 임금이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길입니다.

 

  월대에 장식되어 있는 각종 동물들의 석상입니다.


  각종 석물들이 있는데, 무슨 동물인지 구분하기는 애매한 석물도 있습니다

 

 호랑이

 

 말

 

 공작

 

  모든 궁궐의 정전의 월대는 2층 구조로 되어 있고 빗물이 잘 빠지도록 경사가 져 있습니다.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행랑입니다. 보통 궁궐을 보면 행랑에 방을 만들어 관헌들이 업무를 보기도 하고 창고로 쓰는 곳 도 있습니다.

 

 행각뒤로 보이는 국립민속박물관의 모습입니다.

 

 근정전의 옆에서 바라보는 행랑의 모습입니다.

 

 근정전의 측면에서 오르내리는 계단입니다.

 

 근정전의 측면의 계단에는 청룡둘이 지키고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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