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명전은 처음에는 황실 도서관으로 사용되면서 수옥헌으로 불렸습니다. 수옥헌은 ‘옥을 닦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후 1904년 고종황제가 덕수궁 대화재를 피해 이곳에 머물게 되었고, 나중에 이름이 중명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중명전은 일제식민지의 발판이 되는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된 곳입니다. 수옥헌에서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름이 왜 바꼈을까요? 궁궐 내 건물들의 이름을 지을 때도 사용하는 사람과 용무에 따라 달리 이름을 짓습니다.
궁궐 내 건물의 이름을 지을 때 마지막 자를 전(殿), 당(堂), 합(閤)/각(閣), 재(齋)/헌(軒), 누(樓), 정(亭)의 형식으로 구분하는데 수옥헌의 이름을 지을 때는 왕실 가족의 공무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하여 ‘헌’을 사용하였고, 고종이 머물면서 왕, 왕비 또는 상왕 대비, 왕대비 등의 궐 안의 웃어른이 사용하는 건물에 붙는 ‘전’자를 마지막으로 하는 중명전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중명전은 고종황제가 헤이그특사에게 만국평화회의를 가도록 지시한 곳이기도 합니다. - 출처는 문화재청 문화유산포털입니다
▼ 중명전의 리플릿의 내용을 보면 중명전을 간략하게 설명하여 놓았는데, 치욕적인 일제의 병합의 자리였다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 덕수궁의 사이에 미국대사관저가 있고 좀 떨어져서 중명전이 있습니다. 원래 고종이 덕수궁(경운궁)을 넓힐때 마국대사관저가 없었으면 중명전이 덕수궁과 떨어저서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중명전은 정동극장의 옆 골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중명전을 모르고 있다면 골목끝에 조선의 목에 족쇄를 채웠던 일제의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던 비운의 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를것입니다.
▼ 1층 건물에 들어서면 여러가지 자료와 안내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으며, 조선말기에 열강들에 의해 조선이 변해가는 모습과 고종의 역활들이 상세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진 오른쪽에 보면 2층의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예전의 중화전입니다.
▼ 조선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민간에 넘어 갔다가 국가에서 2005년에 매입하여 2007년 부터 2009년까지 복원하였다는 중명전입니다.
▼ 1층의 왼쪽방에는 을사늑약의 현장을 밀납인형으로 재현하여 놓았습니다.
▼ 여기서 을사늑약의 현장에서 천하의 매국노5인방라고 알고 있는데, 여기서 자세히 봅니다. 한규설만 반대를 하였다고 합니다. 조약[條約]은 국가간의 정식언약 늑약(勒約)은 강제로 맺은 불평등의 언약입니다.
▼ 여기서 천하의 매국노 을사5적의 사진을 올려봅니다
▼ 이토오히로부미를 뒤에서 보면서 담아보았습니다.
▼ 임진년에 왜란으로 나라가 풍비박산이 난후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300년후에 또 나라를 일제에게 뺏앗기고 말았던 조선이었습니다
▼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원문이 보이는데, 해석하여 놓은 글을 잃어보면 참 !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 1905년(을사년) 11월 18일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으며,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 을사늑약에 대한 고종의 무효투쟁은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는 큰 의미를 남기는것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 고종의 헤이그 밀사에게 친서를 주면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려 했던 것인데, 친서상대가 영국왕이었네요
▼ 1907년 을사늑약(1905년)의 부당함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 이상설, 이준,이위종등 3명을 특사로 파견하여 알리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종은 이토히로부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등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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