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구곡의 안내 리플릿을 먼저 보겠습니다.

화양구곡의 지명(地名)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사후에 제자 수암 권상하선생이 계곡을 따라서 구곡을 설정하였으며, 그 이후에 단암 민진원의 글씨를 바위에 각서(刻書) 하였다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 화양동의 유래를 보면, 원래는 황양나무(회양목)가 많아 황양동이라 불렀으나, 우암 송시열선생이 거처를 이곳으로 옮겨와서는 중국을 뜻하는 중화(中華)의 화(華)와 일양복래(一陽來腹)의 양(陽)을 따서 이름을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1곡] 경천벽(擎天壁)입니다. 물가에 가파르게 솟은 바위 모습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아 경천벽이라 명명했다고 합니다.

 

[자료:충북블로그] 경천벽에는 암각서(巖刻書)가 두개 있는데, 그 위치를 표시하였습니다.

 

▼ [자료:괴산군] 꽃 피는 봄이 되면 더 아름다운 경천벽이 됩니다.


[2곡] 운영담입니다. 구름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고 합니다. 얼음이 어는 겨울만 빼고 봄, 여름, 가을의 경치가 끝내줍니다.

 

▼ 물이 고여있는 연못보다는 바위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붉은색 네모 안에 雲影潭(운영담)의 암각서가 보입니다.

 

[사진자료:괴산군]  봄에는 나무의 잎이 없어서 바위의 모습이 더 잘 보입니다.

 

▼ 운영담에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두 개의 돌기둥이 보이는데, 이곳은 하마소(下馬所)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화양서원의 입구에 세워진 문의 일종입니다.

 

지금은 길을 넓히면서 돌기둥 사이가 매우 넓게 떨어져 있지만, 조선 때에는 우마차가 지나다닐 정도의 넓이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하마소에 전해져 오는 말에 의하면,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기 전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산천과 고을을 구경하고 다닐 때에  화양서원의 하마소 앞에 왔는데, 그래도 왕족이라고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말을 타고 들어 가려다 문지기한테 개망신을 당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된 흥선대원군은 제일 먼저 왕가척족들의 권력의 끈을 끊어버리고, 그 다음에 서원철폐령을 내렸는데, 시범으로 걸린 서원이 화양서원이었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이 일개 서원의 문지기한테 망신을 당해서 복수를 하려고, 화양서원을 제일먼저 철폐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아무래도 뒷맛은 개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마무시한 사적, 공적 권력을 가졌던 서원을, 그것도 조선최대의 화양서원을 제일 먼저 철폐하려 했던 흥선대원군의 배포가 놀랍습니다.

 

어찌 됐든 그 당시에는 조선의 적폐였던 서원철폐는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 시대에 변화에 따라서 서원은 점차적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만, 주자학의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 하마소의 돌기둥을 보면, 두 개의 구멍이 보이는데, 이 구멍에 기다란 막대를 끼워서 통행을 제한하였습니다


[3곡] 읍궁암입니다. 읍궁암은 냇가에 있는데, 제방에 늘어서 있는 네 개의 비석들은 우암 송시열의 제자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새겨 넣은 비석들입니다.

 

▼ 읍궁암(泣弓岩)의 주인공, 우암 송시열에 대해서는 주자학의 최고봉, 또는 조선의 최고 골칫거리라는 상반된 평이 있는 분이십니다.

 

우암 송시열은 자료에서 보면 늦은 나이(60세 이후)에 관직에 나아갔는데, 워낙 원칙주의자였는지, 조선최초의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사사건건 왕에게 직언을 하는지라,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이름이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상소의 달인이라고 해도, 정치의 달인 숙종한테 세자(장희빈의 아들 경종)책봉이 너무 이르다고 상소를 하였다가 잘못 걸려서 제주도 귀양 후에 돌아오다가 정읍에서 82세에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우암 송시열은 늘그막에 이 화양천(후에 화양구곡)을 무척 사랑하였는데, 아마도 죽을 때 화양천의 경치를 또다시 보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을 것 같습니다.

 

▼ 널따란 바위가 읍궁암입니다. 효종이 죽자 우암 송사열선생이 이 바위 위에서 매일 새벽에 곡을 하였다는 곳입니다


▼ 모래가 마치 금싸라기 같다는 금사담(金沙潭)입니다. 화양구곡 중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곳입니다.

 

▼ 금사담 위에 있는 멋진 정자는 암서재(巖棲齋)입니다. 암서재는 우암 송시열선생때 지었다고 하는 글과 제자들이 지었다는 글이 있습니다.

 

▼ 암서재 밑에 보이는 바위에는 金沙潭(금사담)각서가 새겨져 있습니다.

 

▼ [사진자료:충남공식블로그] 금사담의 바위표면에 수없이 많은 글귀들과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서 忠孝節義(충효절의)의 글자를 보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절개와 의리를 지킨다는 뜻이며, 이 글씨는 명나라 태조 때 사신으로 갔었던 사람이 글씨를 받아온 것을 바위에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 [사진자료:괴산군청]  산벚이 피던 봄날에 금사담과 암서재의 모습입니다.

 

▼ 계곡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5곡] 첨성대, 도명산으로 올라가는 길옆에 높다랗게 서 있는 첨성대입니다. 등산로 입구에서 아주 가깝습니다

 

▼ 안내판의 첨성대(瞻星臺)의 한문 중에서 대(臺) 자가 태(台)로 잘 못 쓰여 있습니다.

 

▼ 첨성대(瞻星臺)라는 것이 별을 관측하는 곳인데, 사람이 올라기도 어렵기도 하겠지만, 올라가서 앉을만한 자리도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높다랗게 세워진 바위를 보고 별자리도 관측할 수 있겠다 싶어서 첨성대라고 하였을 수 도 있겠습니다.

 

▼ 멀리서 당겨보면, 꼭대기의 바위는 마치 투구처럼 생겼습니다.

 

▼ 첨성대의 밑에서 올려다보면, 글자가 암각(巖刻)되어 있습니다.

 

▼ 첨성대 바위에 각서 된 글은 萬折必東(만절필동), 그리고 밑에 華陽書院(화양서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소경대왕 어필(昭敬大王 御筆), 아래에는 "원효대왕 어필(元孝大王 御筆)"이라 써 놓았는데, 각각 선조(宣祖)와 숙종(肅宗)을 말합니다.

 

즉 萬折必東)(만절필동)의 글씨는 선조의 글씨이며, 華陽書院(화양서원)의 글씨는 숙종의 글씨라고 각서 되어 있습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대한 충성의 표현으로서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이라는 글자를 썼는데, 앞의 글자 만절필동만 새긴 것입니다.

 

※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 : 어떤 고난이 있어도 명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겠다는 뜻의 선조의 글씨입니다. 

 

萬折必東)(만절필동)의 뜻을 직역하면, 강물이 만번 꺾여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재는 꺾을 수 없다는 말이지만, 속뜻은 명나라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6곡] 능운대 , 큰 바위가 우뚝 솟아 능히 구름을 찌를 듯하다 하여 능운대라고 하였습니다. 오른쪽 길은 채운암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 [자료사진:충북공식블로그]  바위에 凌雲臺(능운대)가 각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글자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 계곡을 따라서 계속 걸어가 봅니다.

 

[7곡] 와룡암, 거대한 바위가 마치 용이 누워 있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 와룡암 각서가 보입니다.

 

▼ 저 멀리 학소대 부근의 다리가 보입니다.

 

▼ 도명산으로 통하는 다리입니다. 다리 위에서 보는 절경도 무척 아름답습니다.

 

▼ 다리 위에서 학소대가 조금 보입니다. 학소대는 상류 쪽에서 봐야 제맛입니다.

 

[8곡] 학소대, 바위 위에 학이 살았다(?) 아마도 학을 좋아했던 선비들이 만든 이름 같습니다만, 경치는 아주 절경입니다

 

▼ 꽃 피는 봄에는 바위 윗부분이 잘 보입니다.

 

[사진자료:충북공식블로그]  학소대 각서가 새겨진 부분과 실제 각서의 모습입니다

 

▼ 화양동에서 약 1.5km 거리에 있는 파곶으로 가는 길에 거북이 비숫한 바위가 있는데, 소나무에 가려서 부분적으로 보입니다.

 

[9곡] 파곶(파천), 화양구곡의 마지막 파곶은 평평하고 바위가 드넓게 놓여 있으며, 암반사이로 흐르는 물의 하얀 포말과 물소리를 들으면, 신선들이 이곳에서 술잔을 나누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경치는 끝내 주는데, 학소대에서 여기 파천까지 거리(1.5km 정도)가 좀 있다 보니, 많은 분들이 학소대에서 발길을 돌리는데, 꼭 한번 가 보시기를 권합니다.

 

▼ 파곶(巴串)이라고 각서 되어 있는데, 뱀의 꼬리처럼 튀어나온 곳(?), 파천(巴川)이라는 뱀꼬리 같은 냇가(?), 어느 말의 뜻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화양구곡의 지명을 정하신 우암 송시열의 제자분들만 아실 것입니다.

 

▼ 관찰사 원재명, 그리고 여러 유지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웬만한 좋은 바위에는 이름들이 각서 되어 있습니다

 

▼ 기가 막힌 차양막입니다. 자연적으로 암석의 부분들이 떨어저서 자연적인 지붕이 만들어졌습니다

 

▼ 무슨 이름들이 보이는데, 낙서정도로 보입니다.

 

▼ 널다란 바위가 용의 비늘같은가요?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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