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720m)수많은 암봉과 깊고 수려한 계곡이 빚어내는 절경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3대 암산의 하나이며, 1976년 3월 30일 12번째로 국립공원이 되었다.수백미터 돌덩이가 병풍처럼 솟아있어, 신라 때는 석병산이라 부르다가 통일신라 말엽부터 주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 우리나라 3대 암산(岩山)은 1)청송 주왕산, 2)강원 설악산, 3)영암 월출산이고, 우리나라 3대 기암(旗岩)은 1)청송 주왕산, 2)봉화 청령산, 3)진안 마이산 이다.
주왕산 이름의 유래는 통일신라 말에 중국 당나라 때 주도라는 자가 진의 회복을 꿈꾸며 후주천왕을 자칭하고 반역을 일으켰으나,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이곳 석병산(주왕산의 예전이름)까지 쫓기어 왔으며, 이에 당나라 왕이 신라왕에게 주왕을 잡아달라 하여 주왕은 이곳에서 신라장군(마일성장군 5형제들)에 의해 주왕굴에서 최후를 마쳤다고 전해온다.
※ 여기서 주왕은 주나라의 주왕이 아닌 주도라는 자의 자칭 "후주천왕(後周天王)"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추측이 되며 연대는 799년, 통일신라 39대 소성왕 원년이고 당나라는 덕종 15년이었다.
주왕산의 시대의 기록에 따른 이름은
- 신라시대에는 석병산, 통일신라말부터 주왕산
- 조선시대에는 주방산 또는 대둔산(시증동국여지승람1530, 대동여지도1861,청송군읍지1861), 주왕산(양양기구록1757,
주왕산지1833)으로 불리었다. 관에서 발간된 문헌들은 주방산, 대둔산으로 불렀으나, 민간에서 발간된 문헌에서는 주왕산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주왕전설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 청송군지(1937)에서 공식적으로 주왕산으로 기록한 후 정식적으로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 산행은 2009년 4월26(일) ,경기우리산악회를 따라 다녀왔지만 주왕산 정상 방향이 아닌 장군봉 코스로 해서 폭포를 구경 하고 주산지를 경유해서 귀가 한 산행이었으며,날씨는 흐렸고 오후5시쯤에는 비가 내렸다
▼ 주왕산의 대전사와 기암(旗岩)인데 기암이 뫼산(山)모양을 하고 있다. 이 기암에는 주왕과 신라의 마장군이 일대 격전을 별였던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정상에는 약70평의 넓은 터가 있다. 간혹 인터넷의 산행사진에 이 기암을 장군봉으로 표시하는것이 있는데 장군봉은 따로 있다.
▼ 이번 산행코스의 지도이며 주왕굴까지 추가로 추가하면 약 12km정도의 거리에 5시간의 산행 이었다(출처는 국립공원홈피)
▼ 탐방안내소를 지나 상가지역 초입에서 바라본 장군봉과 기암의 모습이며 가운데는 주방천이라고 한다. 장군봉의 유래는 주왕을 잡으러온 신라의 마일성 5형제가 진을 쳤던 곳 에서 유래 하였다 한다.
▼ 문화재관람매표소(?)의 대전사 입구이며 건장한 스님들이 사복을 입고 요금을 징수 하고 있다. 대전사 옆담장을 지나갈뿐인데,,,
▼ 대전사 담장 옆길을 돌아 장군봉으로 길을 잡는다. 직진하면 주왕산 정상이나 폭포방향이다
▼ 장군봉 방향이며 좌측에 백련암이 보이며, 백련암은 주왕(주도)의 딸 주백련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 우뚝 서 있는 기암의 모습이며 주왕산의 상징이다
▼ 백련암을 지나쳐 빡세게 오르다 보면 조망은 점점 좋아진다. 대전사와 상가지역(우상)과 혈암(穴岩)지역(우하)이 장군봉 가는길까지 시원한 모습을 보여준다
▼ 기암 저멀리에 주왕산 정상이 바라다 보이고 우측 아래는 대전사 부근이다
▼ 장군봉이 가까워진다
▼ 장군봉에서 월미기 방향은 내리막길후 오른길이지만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다. 월미기라는 지명의 유래는 이곳에서 북쪽방향으로 바라보면 월명산이 위치하고 있어 마을사람들이 월명산 방향으로 지나가는 목이란 뜻으로 월명목이라 불렀으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지명이 월미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되며 기(岐)는 "갈림길 기"자 이며, 일본식 발음으로는 키(き)이다.(흔히 쓰는 말중에 기로(岐路)에 서있다라는 말의 첫글이다). 월미기와 비슷한 후리매기라는 지명이 있는데, 지명의 유래는 주왕의 군사가 훈련을 하였던 장소라하여 훈련목으로 불리다가 후리매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 산철쭉이 만개했다
▼ 금은광이 네거리 전의 기암이며 근처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고, 특별히 쉴만한 장소가 없어서 아쉽다.
▼ 금은광이 네거리 전의 성터인데 기록을 찾을수가 없다, 자하성터의 기록과는 위치가 틀린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산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조선시대 약 500여개의 산성이 축정되었다
▼ 금은광이 삼거리이며, 원래는 사거리 였으나 ,현재는 월미기 방향과 세밭골이 만나는 곳일뿐이다. 여기서 세밭골(제3폭포방향)로 내려가는데 한없이 지루하고 약간은 위험한 내리막길이다. 금은광이의 유래는 일제시대 때 이 계곡 위에 금은광산이 있었다고 하여 금은광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금은광이는812.4m다. 지금은 탐방로가 폐쇄되어 오를수가 없다
▼ 세밭골 끝에 도착하면 제삼폭포로 가는 그래도 운치가 있는 아치형 다리를 만난다
▼ 아치교에서 바라본 제3폭포상류(좌상)과, 제3폭포 입구(좌하), 그리고 내원동 방향의 큰골 계곡(우)
▼ 제3폭포의 상단 전망대에서 찍었는데 상단에도 2단으로 폭포가 되어 있다
▼ 제3폭포 하단 전망대에서 바라본 폭포, 수량이 적어도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총 3단으로 물이 떨어진다)
▼ 제3폭포에서 제2폭포로 가는길은 평탕하고 부드러운 편이다
▼ 제2폭포는 여기서 안쪽으로 200m 정도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 가뭄으로 인해서인지 계곡에 물은 많지 않다
▼ 제2폭포의 모습도 훌륭하다 .두타산의 용추폭포의 형상과 비슷하게 움푹파였다. 물과 돌맹이의 힘이 아름다운 홈통을 만들었다
▼ 제2폭포에서 뒤돌아 나와서 이 다리를 통해 제1폭포로 길을 잡는다
▼ 이제 제1폭포에 다다르면 이날의 백미를 맛보게 된다
▼ 제1폭포는 그래도 수량이 많아서 훌륭한 물꽃쇼를 보여준다
▼ 오늘의 신선이 되어 잠시 무아지경에 빠져본다
▼ 오른쪽의 우뚝선 바위는 시루봉인데, 영~~ 아니 올시다. 모양은 설악산 천불동의 귀면암 비슷하다. 좌측은 병풍바위 이다
▼ 오른쪽은 학소대 이며 다리는 학소교인데 부분적인 아치형태로 아름답게 보인다
▼ 학소대 휴게소에사 주왕암 방향으로 길을 오르면 잠시후 망월대가 나오는데 망월대에 올라 바라본 연화봉의 모습이다. 망월대는 주도(주왕)가 아들과 딸과 같이 달구경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 망월대에서 바라본 병풍바위(좌)와 우측은 급수대이다
※ 급수대는 신라37대 선덕왕이 후예가 없어서 무열왕 6대손인 상재 김주원을 38대왕으로 각부 대신들이 추대하였는데 즉위 직전에 돌연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고자 내란을 일으킴으로 김주원이 왕위를 양보하고 석병산으로 은신하여 대궐을 건립한 곳이란다. 대궐터는 급수대 정상이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유적이 남아있다 한다. 김주원이 대궐을 건립하여 은둔생활을 할 당시 산상에는 샘이 없었으므로 계곡의 물을 퍼올려서 식수로 사용하여 급수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으로 봐서는 거의 불가능할것 같은 전설이다
▼ 주왕암의 알주문격인 가학루이다,규모에 비해서 문루가 꽤 정교하고 꽤 운치가 느껴지는 문루이다.
▼ 현판의 가학루라는 글씨는 문간체라고 하는데 우리같은 사람은 거의 무슨 글씨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문지방이 휘어진 나무를 다듬어서 부드럽게 잘 처리한것이 눈에 띈다
▼ 주왕암 뒷편 주왕굴 방향의 기암들
▼ 주왕암은 자하성 맞은편 계곡을 건너 약 1,000m 지점에 주왕암(周王庵)이 있다.. 이 암자는 대전사와 함께 창건한 고찰이며, 대전도군(大典道君)이라는 주왕의 아들이 주왕의 이름을 따서 암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조용한 분위기가 맘에 든다.
▼ 주왕이 신라의 마장군에게 최후를 맞이하였다는 전설의 주왕굴.
▼ 수달래 모습이며 수단화라고도 한다.철쭉과의 식물이며, 주왕산에 숨어든 주왕이 주왕굴에서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숨질 때 흘린 피가 주방천을 흐르고 이듬해부터 꽃이 피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수달래이다,주로 계곡의 물가에 자생하여 군락을 이룬다
▼ 좌측은 고려산의 진달래이며 우측은 주왕산의 수달래이다,수달래의 꽃잎에 검붉은 반점이 뚜렸하다.
▼ 대전사는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때 명승 나옹대사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이름을 따 대전사(大典寺)라 불렀다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로 표기되어 있다.보광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02호이다
▼ 대전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672년(신라 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세웠다는 설과 919년(고려 태조 12)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절이 있는 산과 절의 이름은 주왕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 대전사 앞뜰에는 매화도 한창이다
다음은 주왕산 탐방안내센터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주산지이다
▼ 주산지는 280여년 전인 1720년(숙종 46) 착공해 이듬해 10월에 완공한 인공 저수지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바닥이 드러난 적은 없다는 주산지. 둑에 서있는 작은 비석엔 ‘정성으로 둑을 쌓아 물을 막아 만인에게 혜택을 베푸니, 그 뜻을 오래 기리기 위해 한 조각 돌을 세운다(壹障貯水 流惠萬人 不忘千秋 惟一片碣)’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 물이 많이 부족한 관계로 왕버들이 뿌리부분까지 드러내놓고 있다
▼ 물이 많았으면 환상의 절경을 보여 주었을텐데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 주산지 구경을 거의 끝낼무렵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날이 가물어서 비가 많이 와야 할텐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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