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군 보급장교로 근무했던 진 굴드[Gene Gould]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1월에 내한해서 다음해 6월까지 머무르며 수원과 인연을 맺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지난 2005년 미국 오리건주에 거주하던 진굴드는 한국전쟁 때 함께 일했던 한국인을 찾고 싶다며 당시 수원 사진들을 지역신문인 경기일보에 보내어 게재하였다. 이를 본 수원시에서 진 굴드의 한국 지인을 통해 연락하여 희귀 사진 108점을 확보하였다. 이 사진들은 미공군 제8비행대대에 근무했던 진 굴드가 당시에도 귀했던 35mm 코다크롬 필름으로 찍은 것이다. 1952~1953년의 수원과 인근 지역 안녕리 용주사 일대의 다양한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마을 풍경과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에서 아련함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 내용과 사진은 수원박물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팔달문 앞 미완성 도로[1953년 | 수원박물관]
팔달문 옹성의 철(凸)형 여장과 홍예문은 1913년 이후 일제가 철거했으며 이후 팔달문 좌우의 적대(敵臺)와 성벽도 헐어버렸다. 아직 도로가 정비되기 전 팔달로의 모습이다.

 

미공군 소위 진 굴드[1953년 | 수원박물관]
진 굴드는 1952년 11월부터 1953년 6월까지 한국에서 근무하였다.

 

장안문 앞 도로의 진 굴드[1953년 | 수원박물관]
진 굴드의 뒤에는 농지에서 두엄내기를 하는 농부가 보이고, 멀리 연무대 지붕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서있는 곳은 장안문 밖 도로이다. 진 굴드 사진에는 그가 기록한 영문이 남아있다.

 

장안문 밖 서울로 향하는 1번국도[1953년 | 수원박물관]
장안문은 한국전쟁 당시 포격으로 인해 중층문루가 무너졌다. 장안문 누각은 사라졌지만 옹성 문루는 잔존해 있다. 사진 우측에는 북서포루(北西砲樓)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원역 앞에서 휴식 중인 미군들[1953년 | 수원박물관]
이동 중인 미군들이 군장과 더블백을 내려놓은 채 수원역사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수원역 건물은 1928년 일제가 조선식으로 지은 것인데,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기와지붕이 모두 사라진 모습이다.

 

팔달문 서쪽 측면[1953년 | 수원박물관]
팔달문 양옆의 성곽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졌다. 일제가 팔달문 동쪽의 남공심돈 일대와 팔달문 서쪽 성벽 구간을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성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민가가 자리 잡고 있다.

 

세류동 피난민촌[1952년 | 수원박물관]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수원화성 및 수원천을 비롯해서 수원 곳곳에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다. ‘연무동 공설운동장터’와 ‘세류동 일대’가 대표적인 정착촌이었다.

 

용주사 대웅보전[1953년 | 수원박물관]
용주사는 정조가 1789년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으로 조성한 후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1790년에 창건한 왕실 원찰이다. 용주사의 대웅보전내부에 봉안되어 있는 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幁畵)는 조선후기 화원인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다.

 

융릉 앞 영문으로 쓰여진 경고문[1953년 | 수원박물관]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의 홍살문 앞에 영문으로 된 경고문이 있다. 경고문에는 무기류를 휴대하고 들어갈 수 없다고 적혀있다.

 

융릉 앞의 진 굴드[1953년 | 수원박물관]
융릉 입구에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는 경고판이 있었으나 전시였기 때문에 권총을 소지한 채 사진을 찍었다.

 

융릉 비각[1953년 | 수원박물관]
비(碑)를 안치하기 위해 세운 건물인 비각은 가로(街路)상에 설치하기도 하고 사찰이나 능묘(陵墓)에도 건립했다.

 

화성애육원[1953년 | 수원박물관]
전쟁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전쟁고아일 것이다. 한국전쟁 중 수원비행장 인근에 화성애육원을 비롯한 3개의 고아원이 운영되었다. 진 굴드는 고아원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고향인 미국 오리건주 사람들로부터 수집한 옷가지 등의 구호품을 전달하였다.

 

화성애육원의 선물[1953년 | 수원박물관]
화성애육원에서 진 굴드에게 준 선물이다. 진 굴드는 애육원 아이들에 대한 지원을 많이 했기 때문에 애육원 측에서 탄피로 만든 밥그릇과 수저세트를 선물하여 감사의 뜻을 전달한 것이다.

 

안녕리(화성시) 김후봉[1953년 | 수원박물관]
진 굴드는 화성시 안녕리에 사는 김후봉의 사진과 직접 그린 그림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촬영한 사진 속 몇몇의 한국인을 그리며 남다른 애정을 표시했다.


앞의 사진 외에도 또 다른 이방인들이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찍은 사진들이 슬라이드 필름과 인화된 사진으로 남아있다. 사진 뒷면에 그들이 기록한 영문 설명을 통해 수원화성임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사진들은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이전의 수원화성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호주인 선교사 매혜란(Helen P. Mackenzie, 1913~2009) 이 찍은 장안문 앞 사진은 전쟁 속의 수원화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하늘에서 찍은 항공사진을 통해 수원시의 전경도 살펴볼 수 있다.
 

- 사진 및 내용은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봉돈 위의 미군[1961년 5월]

 

범람한 수원천변에서 빨래하는 사람들[1950년대]
사진 뒷면의 영문 기록대로 범람한 수원천변에 나와 여인들이 빨래하는 장면으로 군용 트럭 안에서 촬영한 듯하다. 건너편 천변 가까이 늘어선 판자촌이 눈에 띈다.

 

수원에 입성한 미군과 팔달문[1950년 9월 22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과 인접한 수원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후 9월 21일 미군 제7사단 정찰대가 마침내 수원에 입성하였다. 팔달문 앞에 미군들이 수원시민들과 섞여 있고, 팔달식당 앞의 전봇대에는 ‘大韓民國萬歲’라는 글씨가 보인다. 사진 뒷면에 미군 제7사단의 수원입성 관련 내용과 미 육군 상병 다니엘 톰킨스(Daniel Tompkins)가 사진을 찍었다는 영문 기록이 남아있다.

 

재정비하는 팔달문 밖 거리[1950년대 초]
옆의 사진과는 달리 팔달문 앞의 가옥과 상가가 사라지고 길폭이 확장되었다. 길가의 전신주를 인부들이 정비하고 있다. 사진 뒷면에 ‘INNER GATE TO Town on inside’라는 영문 기록이 있다.

 

중층문루가 반파된 장안문[1950년]
미 제5공군이 접수한 수원비행장은 연합군의 수송과 보급기지였으며, 폭격기부대의 발진기지로도 활용되었다. 개전 초기에 폭격을 맞은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이자 서울로 향하는 관문으로 이후 탈환과 재탈환 과정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다.

 

격전지 속의 장안문[1952년 4월경 | 부산 일신기독병원·경기대학교박물관 제공]
호주인 선교사로 부산 일신기독병원의 설립자인 매혜란(Helen P. Mackenzie, 1913~2009)이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출발하여 전라도와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이동하면서 구호활동을 하던 중 찍은 사진이다. 장안문 앞에 파괴된 인민군의 소련제 T-34 전차가 버려져 있다.

 

중층문루가 날아간 장안문[1952년 4월경 | 부산 일신기독병원·경기대학교박물관 제공]
호주 선교사인 매혜란이 장안문의 안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홍예문과 문루가 완전히 사라진 장안문에서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미군 트럭이 들어 오는 팔달문[1950년대]
팔달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려는 미군트럭에 군인이 경례하고 있다. 군인의 철모에 ‘MP’라고 쓰여 있어 미군 헌병으로 짐작된다.

 

무너진 옹성벽에 수풀이 무성한 팔달문[1950년대 초]
수원이나 오산비행장에서 근무하던 군인들이 수원을 찾을 때 먼저 만나는 문은 팔달문이었다. 정문 앞에 세워둔 돌기둥과 오른쪽으로 돌아가라는 영문의 표지판으로 보아 사람들은 정문을 통과하고 차량은 로터리를 돌아가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분주한 팔달문 밖 거리[1955년 3월]
팔달문 앞 대로를 활보하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손수레를 끄는 사람들 틈으로 미군 트럭과 자동차도 바삐 움직이며 분주한 거리 풍경을 자아낸다. 오른편에 시외로 드나드는 버스정류장이 이곳이 수원의 중심지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동사거리에서 팔달문을 배경으로[1955년 3월]
중동사거리에서 팔달문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한 미군장교 옆의 입간판 내용이 당시 시대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방화수류정과 화홍문[1950년대]
수원화성에서 절경으로 꼽히는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의 풍경이다. 화홍문 수문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노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이방인을 응시하는 팔짱을 낀 아이가 인상적이다. 지대가 높아 바람이 시원한 방화수류정에는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화홍문 앞 과일을 파는 노인[1958년 7월]
화홍문 앞에서 과일 노점의 상인과 마치 흥정이라도 하는듯 이방인의 미소가 흥미롭다. 수원화성의 명소로 유명한 화홍문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곳이므로 그 앞에 늘 노점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성문 위의 이방인[1958년 7월
미군 일행과 함께 온 백인 여성의 모습으로 수원화성을 돌아보며 낯선 땅의 고적(古跡)에서 한 컷의 사진을 남겼다.

 

북암문 쪽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1958년 7월]
수원화성의 여름 풍경으로 성벽 주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멀리 문루가 파괴되고 성문만 남은 창룡문도 눈에 들어온다. 이방인에게는 연을 날리고 있는 아이들이 신기하고, 아이들에게는 카메라를 든 이방인이 신기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수원화성[1950년대 추정]
수원화성의 성곽 전체 모습과 성 안팎의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보기 드문 항공사진이다. 1796년 완공된 수원화성의 모습이 뚜렷이 남아 있으나, 장안문과 창룡문의 문루가 없어 한국전쟁 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수원역 앞 시가지[1950년대 추정]
1905년 경부선 철도개통과 함께 조성된 수원역 인근을 촬영한 항공사진이다. 수원역은 1905년 1월에 영업을 개시한 후 수원의 물자와 인력 이동 수단으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수원의 상권 판도를 크게 변화시켰으며, 수원역과 기존의 성내 번화가를 잇는 신작로의 개설로 인한 수원의 시가지 확장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수원역사는 1928년 조선식으로 개축하기도 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역사가 전소되었다. 수원역사의 모습을 볼 때 이 사진은 한국전쟁 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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