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일 한국전쟁이 터지고 미군을 포함한 수많은 외국군인들이 주둔하게 되었는데, 사진을 많이 남긴 군인은 역시 미군이었습니다. 1950년부터 1970년대 까지 수많은 사진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수원비행장이나, 오산비행장에 주둔하면서 찍은 수원시 지역이나, 수원화성의 사진을 선별해서 올려 보았습니다.
- 자료와 사진은 수원박물관/수원화성박물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1950년대 미국 제5공군 부대(현 수원비행장)에서 근무하던 마빈(Maevin) 하사는 수원으로 외출하여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수원화성 성곽과 성 안팎에 거주하는 피난민들의 고단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여러 명의동료들과 함께 팔달문에 도착하여 남포루, 서장대를 거쳐 화서문, 방화수류정을 지나 수원천변 우시장과 가게를 돌아보는 여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빈의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수원화성과 그 안에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수원박물관에 총66점이 소장되어 있다.
▼ 중동사거리에서 본 팔달문 앞 거리[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 중동사거리 교통경찰[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 성벽 따라 팔달산 오르는 길[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하단에 가장 크게 보이는 초가집은 팔달문의 서쪽에 위치한 것이다. 초가집 너머 팔달산으로 오르는 계단과 남포루(南砲樓)가 뚜렷하게 보인다.
▼ 남포루 앞에서[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마빈이 남포루 아래 성곽 밖에 앉아있다. 포루 위 누각이 완전히 사라졌으나 벽돌 건물은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에는 5개의 포루(砲樓)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남포루는 가장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일행으로 보이는 군인이 성벽 위에서 마빈을 내려다 보고 있다.
▼ 사진 찍는 병사와 관광객들[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팔달산에서 급경사를 이루는 성벽의 시작은 서남암문에서 팔달문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사진 속의 미군은 남포루에서 마빈을 내려다보던 동료로 보이며 무너진 성벽 위에는 여성들이 걸터앉아 있다.
▼ 팔달산에서 본 전경[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팔달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팔달문 모습이다. 팔달문 주변이 당시 수원에서 가장 큰 번화가였음을 사진을 통해 알수 있다. 팔달문 로터리를 도는 트럭 뒤로 1952년 9월에 개관한 중앙극장이 보여 마빈의 사진촬영 시점을 파악할 수 있다.
▼ 서남암문 앞의 아이들[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아이들이 있는 곳은 서남암문이자 서남포사 앞의 용도(甬道)이다. 원래 서남암문 위에는 포사가 있었으나 포사와 암문의 홍예까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파괴되어 있다. 사진을찍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경계도 없이 해맑게 웃는 아이들중에 하얀 옷을 입은 당당한 표정의 아이는 마치 무리의 대장처럼 보인다.
▼ 팔달산 위에서 미군과 아이들[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팔달산 위에 아이들과 미군이 있다. 미군은 동생을 업고있는 아이에게 껌을 내밀고 있다.
▼ 팔달산 성벽 위의 아이들[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아이들의 위치는 서포루(西舖樓)부근이다. 사진 중간에 서장대의 기둥을 지탱하던 장주초석長柱礎石이 보인다. 서장대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면서 초석을 제외하고 자취를 감추었다가 1970년대가 되어서야 본래의 위용을 찾을 수 있었다.
▼ 팔달산에서 내려다 본 서이치와 서포루[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수원화성에 있는 10개의 치성(雉城) 중 팔달산 중턱에서 북쪽에 위치한 서이치(西二雉)다. 서이치 바로 옆에 위치한 성곽시설물은 서포루(西砲樓)인, 기단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져버렸다. 저 멀리 너른 들판 밖에 정조의 명으로 만든 인공저수지인 만석거(萬石渠)가 보인다.
▼ 서북공심돈 아래 움막[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공심돈(空心墩)은 적의 동향을 살피면서 공격과 수비를 할 수 있는 방어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는 수원화성에만 있다. 사진 속 서북공심돈은 성곽 안쪽 모습이다.
▼ 중층문루와 홍예문이 사라진 장안문 안쪽[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중층누각이 한국전쟁 때 포격을 맞아 사라지고 이후 홍예문은 물론 성문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 육축(陸築)의 일부가 부서져 나갔다.
▼ 방화수류정 주위에 임시로 집을 짓고 사는 피난민들[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피난민들은 마을을 이루어 성곽 이곳저곳에 집을 지었다. 방화수류정 앞에 위치한 북암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과 나무 사이에 빨래줄을 걸어놓고 이불을 널어놓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 화홍문이 보이는 수원천과 삼일교[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수원천변 좌측으로 길게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수원천을 가로질러 놓은 다리는 삼일교이며 저 멀리 화홍문이 보인다.
▼ 수원 우시장[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수원의 우시장은 조선후기 이래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수원 우시장이 발전한 것은 정조의 신도시 발전 정책과 연관이 있다. 수원에 둔전을 경영하면서 농민들에게 종자와소를 나누어주었고 이후 우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수원우시장은 매향중학교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 지게를 진 마빈 하사와 지게 장수[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 미군에게 장죽을 팔려는 노인[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안경 쓴 노인이 말도 통하지 않는 카메라를 멘 미군에게 장죽을 팔기위해 흥정을 하고 있다.
▼ 미국 제5공군 부대[1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미국 제5공군 부대는 1950년 6월부터 1954년 6월까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미국 제5공군이 접수한 수원비행장은 연합군의 수송과 보급기지였다.
▼ 작업을 지시하는 미군[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 수원 사람들과 미군[950년대 초 | 수원박물관]
장소는 팔달산 중간도로인듯이 보인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공군의 로버트 리 월워쓰(Robert Lee Walworth)의 슬라이드 사진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2015년 TV 방송을 통해서였다. 월워쓰는 1931년 12월 17일 콜로라도에서 태어나 2013년 9월 20일 오리건주 세일럼에서 생을 마감했다. 1951년부터 1971년까지 20년간 미공군으로 복무하였고 전문사진가들이 구독하는 사진잡지를 볼 만큼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사진을 미국인 더글라스 프라이스(Douglas Price, 1950~)가 입수하여 2015년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기증된 68점의 사진들은 1953년 5월부터 10월까지 찍은 것으로 수원화성과 오산비행장주변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 아래 사진은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미공군의 로버트 리 월워쓰입니다. 전투기조종사는 아닌듯 하며 책상 오른쪽 구석에 사진기가 놓여져 있는데 아마도 저 사진기로 수원화성의 모습믈 담았을 것 입니다. 모든 사진은 1953년 5월~10월까지 찍은 사진입니다.
▼ 미공군 로버트 리 월워쓰[1953년 1월 18일]
월워쓰는 1953년 오산비행장에서 근무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산비행장이 송탄에 들어선 시기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인데, 원래는 육군 기지였다가 1952년에 공군 기지로 조성되면서 2,700m의 활주로가 정비되고 전투기가 배치되었다.
▼ 미공군의 동료와 로버트 리 월워쓰(우측)가 어느 무덤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 장안문 옹성 측면[1953년 8월 24일]
장안문의 서측에서 찍은 사진으로 성벽 일부가 퇴락했지만 웅장함은 감출 수 없다. 전쟁 이후 중층문루와 홍예문이 소실되었지만 옹성과 옹성문루는 남아있다. 장안문 옹성문루는 수원화성 축성 당시에는 만들어지지 않았다가 1824년 순조대에 축조되었다.
▼ 장안문 성벽 위의 아이들[1953년 8월 24일]
동네 개구쟁이들이 장안문 서측 성벽 여장 위에 앉아있다. 성벽 위 여장의 상단부분을 옥개전(屋蓋塼)이라고 하는데 상당히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저분들이 지금은 70대쯤 되었을것입니다.
▼ 성벽 안에서 바라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1953년 8월 24일]
화서문 문루의 기와가 훼손되어 있다. 성벽 안팎에 형성된 피난민촌은 마치 성벽을 의탁하고 있는 듯하다. 서북공심 돈은 3면이 성벽 밖으로 돌출되어 있는 군사시설물이다.
▼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대유평 일대[1953년 8월 24일]
화서문 및 서북공심돈과 성 안팎의 풍경이 조화를 이룬다. 머리 위에 새참을 이고가는 여인이 보인다.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 중 하나인 대유평의 농경지는 풍년을 예감하게 한다.
▼ 서쪽 성벽과 넓은 농경지[1953년 8월 24일]
성곽 밖 서북각루 위쪽에서 바라본 화서동 일대이다. 성벽 건너편에 숙지산과 민가가 보이며 들판 너머 만석거 일부도 보인다. 이방인의 눈에도 오래된 성벽과 고즈넉한 농촌마을의 풍경이 아름다워 보였던 모양이다.
▼ 서장대로 올라가는 성벽[1953년 8월 24일]
서쪽 성벽에서 서장대로 올라가는 길에서 찍은 성곽 전경이다. 팔달산 정상에는 미군 제8부대 관측소가 설치되어 있고 성벽 사이 길로 사람들이 통행하고 있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 하부석축만 남은 서포루(西砲樓) 터가 보인다.
▼ 버스 안에서 본 팔달문 주변 풍경[1953년 8월 11일]
팔달문 앞에는 군용트럭이 지나가고 서울직행 도강버스,영등포행과 청주행 버스안내 표지판이 창문 너머로 보인다. 팔달문 앞 시외버스 정류장에는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 팔달문 앞 사람들과 지나가는 버스[1953년 8월 11일]
오랜 시간과 전쟁으로 팔달문 문루는 2층 왼쪽에 잡상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으며, 판문도 파손되었다. 팔달문을 지나가는 버스와 길가에 앉아있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1950년대 풍경을 살펴볼 수 있다.
▼ 팔달문 밖 시외버스 정류장[1953년 8월 11일]
버스 안에는 수원에서 시외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 성안 마을에서 바라본 수원화성의 동쪽[1953년 8월 24일]
성안 마을에서 찍은 사진으로 가까이는 민가가, 저 멀리에는 화홍문 누각과 방화수류정, 동장대와 동북공심돈 등이 보인다.
▼ 성안 마을 민가의 풍경[1953년 8월 24일]
성안마을 살림집 풍경으로 초가지붕 위에 열린 박꽃은 물론 길게 널어놓은 빨래와 집안 우물, 지붕 위에 올려놓은 싸리비, 저 멀리 무언가를 이고 가는 아낙네들이 보인다.
▼ 수원비행장에 착륙하는 비행기[1953년 5월 19일]
미국 Curtiss 항공사가 1943년에 개발한 수송기인 C-46가 수원비행장에 착륙하고 있다. 비행기가 낮게 나는 구역이 어서 주의하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수원비행장은 일 제에 의해 건설된 것인데, 한국전쟁 당시 미군기지로 사용 되었다.
▼ 사진을 찍으며 여가를 즐기는미군들[1953년 5월 19일]
부대내에서 병사들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병사들 옆으로 탄약 박스가 쌓여있어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병점 이정표[1953년 10월 3일]
수원경찰서 병점지서에서 세운 병점 이정표가 도로 좌측에 세워져 있다. 병점에서부터 오산, 평택, 천안, 온양, 조치원까지의 거리를 표시하였다. 수원을 출발한 군용트럭이 병점으로 진입하고 있다.
▼ 오산 공군기지 주변 거리[1953년 10월 3일]
오산 공군기지 주변의 번화한 거리이다. 버스에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있다. 트럭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있다. 버스와 트럭 주위로 여자아이들이 바구니에 담긴 물건을 팔고 있다.
▼ 오산비행장근처의 마을의 사진을 찍고 있는 미군의 모습입니다.[1953년 7월 8일]
이방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졌던 한국의 농촌마을 풍경을 미군이 카메라에 담고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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