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의 여러박물관에는 수원과 수원화성의 아주 오래전에 찍은 사진들이 다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때에 유리건판에 찍은 수원화성의 사진들을 골라서 올려 보았습니다. 사진을 찍은 시기는 조선총복부에서 일본인 학자들을 시켜 1915년 부터 1935년 까지 20년간 조선의 모든 문화재를 조사했던때의 시기와 비슷하게 보입니다. 수원의 옛날사진(2)의 옛조선고적도보11권에 올려진 중복된 사진은 제외하였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참고로 유리건판 사진기의 모습을 올려 보았습니다 아마도 60대 이상인 분들은 아실만한 사진기 입니다 -

▼ 먼저 장안문의 사진들을 보겠습니다. 장안문(長安門)이라는 현판이 보이는것을 보니 옹성문 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 장안문 옹성밖에서 찍은 정면의 모습과 민가들의 모습입니다.

▼ 장안문 옹성밖의 모습인데 길다란 나무기둥이 누워 있는곳을 보니 일제강점기 전봇대를 박으려고 준비하는것으로 보입니다.

▼ 장안문 옹성안에서 옹성문을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 장안문의 성 안에서 보는 모습입니다. 도로 정비중인듯이 보입니다

▼ 화홍문과 연결된 성곽위에서 바라보는 장안문입니다

▼ 멀리 장안문이 보이는데, 아마도 현재의 삼일상고앞에서 찍은듯 합니다

▼ 창룡문의 사진을 보겠습니다.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문루(門樓)루의 모습이 나라의 운명을 보는듯 합니다.


▼ 창룡문의 옹성이 보이는데, 성밖에는 마늘밭이 보이고, 초막이 보이는데, 울창한 소나무가 인상적입니다.

▼ 창룡문에서 바라보는 연무대입니다.


▼ 동복공심돈의 모습도 처참하기만 합니다.

▼ 팔달문을 수원천의 북수문쪽에서 바라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아마도 북수문이 헐린 자리에서 찍은듯이 보입니다. 민가앞에는 성돌의 흔적이 보입니다.

▼ 팔달문의 옹성루가 헐린후의 모습입니다. 인단가게가 보이는것을 보니 일본상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듯 합니다. 인단은 일제강점기때 일본상인들이 팔기 시작했는데, 향기롭고 시원한 맛이 나는데, 부인병에도 좋고, 소화불량, 구취제거에도 좋다고 합니다. 인단이 인기가 좋다 보니 한국에서 은단이라는 이름으로 상품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 팔달문의 성문밖 상가들의 모습인데, 초가집들이 없어지고 현대식 상가들이 들어선것을 보니 일본상인들이 거의 상권을 장악한 모습인듯 합니다.

▼ 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올라간 성곽에는 남포루가 있습니다. 화성의 모든 포루는 벽돌로 만들어졌습니다

▼ 기와집 민가의 모습입니다. 집 안주인이 장독대를 살피는 사진인데, 그나마 잘사는 집처럼 보입니다

▼ 팔달문 밖의 민가들의 모습인듯 한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멀리 북쪽으로 광교산자락이 보입니다.

▼ 수원민가 사진인데, 촬영 장소는 구체적으로 설명이 없습니다

▼ 화서문의 사진인데, 사진이 이중노출이 된듯합니다

▼ 서북공심돈의 성벽은 대체로 온전한 모습입니다. 다만 공심돈의 지붕은 많이 무너졌습니다

▼ 공심돈의 초가라는 제목이 있는데, 현재 화서문의 서북공심돈인지, 아니면 팔달문 근처의 남공심돈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희마하게 인단이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남공심돈의 근처의 가게모습인듯 합니다. 남공심돈은 현재 복원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영원히 복원하지 못할 듯 합니다.

▼ 1922년에 수원에 아주 큰비가 내려서 화홍문과 남수문이 모두 파괴 되었었답니다. 그때의 모습인듯 한데, 용연의 둑이 무너져 용연이 흔적도 없고 다만 용두구만 남아 있는 모습입니다.


▼ 방화수류정밑에 있는 용연의 배수구에 있는 용두구입니다.

▼ 위태해 보이는 방화수류정입니다.


▼ 일제강점기때였지만 방화수류정을 보수하는 모습입니다.

▼ 일제강점기때 화홍문의 여러 사진들입니다. 장안문으로 이어진 성벽은 헐려서 소가 지나가는 모습입니다.

▼ 화홍문은 1922년에 대홍수로 석문과 건물이 전부 무너졌었는데, 1925년에 석문이 다시 세워졌고,1935년에 화홍문의 건물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석문과 화홍문의 문루가 깨끗한 것을 보니 1935년 이후가 아닌가 싶습니다.







▼ 화성봉돈의 사진입니다. 성안쪽에 찍은 사진인데, 많이 무너졌습니다



▼ 성밖에서 보는 봉돈의 모습은 대체로 건재하여 보입니다.

▼ 정조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는 화령전의 운한각입니다. 화령전은 화성행궁과 별개의 장소에 있는데, 순조가 아버지 정조의 사당으로 화령전을 만들면서 운한각에 어진을 보관하였습니다.

▼ 수원화성과 융건릉은 서로 떼어놓고 말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 수원시와 화성시가 나뉘어져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다고 보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엣 사진에는 융건릉이나, 용주사는 모두 수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래 시진은 정조의 건릉입니다.

▼ 용주사의 모습입니다.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현릉원을 수원으로 천장하면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으면서 원래의 절을 크게 지었다고 합니다.

▼ 용주사의 천보루입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것을 보니 4월 중순인듯 합니다.

▼ 용주사의 대웅보전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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