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때 조선총독부의 후원 아래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 ·다니이 사이이치[], ·구리야마 슝이치[] 등이 1915년∼1935년의 20년간에 걸쳐 낙랑시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고적을 주로 하고, 거기에 각종 유물들의 도판을 모아 15첩으로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고적도보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제11권에 수원과 수원화성의 사진들이 들어 있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포털에는 조선고적도보 11권에 22장의 수원과 수원화성의 사진이 있으며,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화성전도의 모습입니다. 비교적 상세하게 그린 그림이라서 지금의 수원화성을 알아보는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림을 사진으로 찍은듯 합니다

 

▼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은 아닙니다만, 참고로 올립니다. 아주 자세하게 그린 수원화성전도 입니다[출처 경기대박물관]

 

▼ 조선고적도보11권에 수원의 모습과 수원화성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습니다.

 

▼ 조선고적도보를 만든 일본학자 3명의 사진인듯 합니다. 어느 사당앞에서 찍은 사진인듯 한데, 자료에는 장소가 어디인지 설명이 없었습니다. 사진사를 고용하여 다닌듯 하며, 유리건판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 하늘에서 보는 수원의 시가지 모습입니다. 1920년대에 항공기로 사진을 찍었다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남수문은 허물어져 흔적도 없는것을 보니 1925년 이후 사진인듯 합니다.

 

▼ 장안문 정면의 모습입니다.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은 옹성이 설치되어 있으며, 사진에서 보이는 옹성루(樓)는 원래 화성을 만들때는 없었고 정조 사후에 순조때 만들어진 것 입니다.

 

▼ 장안문 아쪽에서 보면 문지기의 초소가 있는것이 특이 합니다.

 

▼ 사진이 기울어졌지만 보정을 하지않고 그대로 인용하여 올렸는데, 화서문 방향에서 보는 장안문의 문루(門樓)입니다.

 

▼ 장안문의 내부에서 보는 공포입니다.

 

▼ 장안문 옹성안에서 북쪽 방향으로 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옹성의 여장이 많이 무너져 내린 모양입니다.

 

 ▼ 장안문 밖에서 찍은 사진이며, 성곽의 여장이 많이 훼손된 상태로 보입니다만, 화성의 정문이었던 장안문의 기품은 그대로 입니다.

 

▼ 아마도 지금의 봉돈에서 화서문과 장안문사이의 방향으로 찍은 것 으로 보입니다. 왼쪽에는 화서문이 오른쪽에는 장안문이 보입니다. 성안에는 민가들이 상당히 많이 보입니다.

 

▼ 다음은 팔달문의 사진들입니다. 팔달문 밖에서 동쪽방향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성곽 동쪽에는 남공심돈이 보이는데, 지금은 없습니다만. 현재의 관광안내소앞 부근입니다.

 

▼ 일제강점기 초기때의 1910년대의 모습인데, 팔달문의 옹성이 그대로 있습니다.

 

▼ 조선고적도보에 있는 팔달문의 사진이 2종류로 나오는데, 지금 사진은 옹성의 문루가 허물어진 상태로 보입니다. 아마도 연대가 틀리게 찍힌 사진인듯 합니니다만, 팔달문 밖의 거리를 보면 일본 상점들이 많아졌는데, 일본상인들의 확장되던 시기인듯 합니다. 잘려진 옹성은 지금 원형 그대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 화서문의 성밖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성곽을 따라서 심어져 있는 소나무가 상당히 운치있어 보이는데, 지금이라도 소나무를 심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화서문안의 모습을 보니 마늘밭으로 보입니다. 화서문 왼쪽의 성곽이 그대로 보이는 것을 보니, 1910년대로 보입니다.

 

▼ 창룡문의 옹성안에서 일본인 학자의 사진입니다.

 

▼ 연무대(동장대)의 사진입니다. 일본인이 무엇인가를 적고 있는 모습입니다

 

▼ 조선고적도보를 만들기 위한 조사를 하던 일본인들과 그 가족들로 보이는 사진입니다. 위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지붕의 기와들이 허물어진것을 보니, 지금 사진이 좀 기간이 지난 후에 찍은 사진인듯 합니다.

 

▼ 조선고적도보에 있는 사진들을 보면 일부 삐뚤어진 사진들이 보이는데, 옛날 사진기는 무척 무거워서 삼각대를 설치 하고 사진사가 수평을 잡고 사진을 찍었을텐데, 아마도 인화 과정에서 사진이 기울진듯 합니다. 원본 사진 변형금지 규칙이라서 그대로 올려봅니다.

 

▼ 동북공심돈과 그 아래에 있는 동복노대의 사진들입니다. 일제강점기에도 동북공심돈은 현형 그대로를 유지 하고 있었는데, 6.25 한국전쟁때 연합군(호주공군)폭격기에 의해서 많이 무녀졌습니다.

 

▼ 동북노대의 모습인데 그닺 훼손되지는 않은 모습입니다.

 

▼ 동북노대의 모습을 성밖에서 보는 모습입니다. 원형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전돌(벽돌)로 만든 여장은 지금과 비교해 봐도 상태는 무척 좋아 보입니다.

 

▼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입니다.

 

▼ 성곽 위에서 방화수류정과 성밖의 용연, 그리고 민가들의 모습들입니다.

 

▼ 성밖에서 보는 유천(지금의 수원천)과 방화수류정, 화홍문의 모습입니다. 일제 강점기때의 수원 사진을 보면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이 많이 보입니다. 그많큼 두 건축물의 아름다움이 뛰어 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 방화수류정은 남아 있는데, 화홍문의 문루는 흔적도 없습니다. 또한 용연의 수구인 해치 모습도 보이는데, 용연의 둑도 흔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1920년대 수원의 대홍수때 둑도 허물어지고, 화홍문의 누각도 허물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농부들의 지게에는 무가 실려 있는데, 물도 별로 없는 냇물에 무를 씻고 있습니다.

 

▼ 이 사진은 아무리 봐도 위의 사진과 같은 날자에 같은 시간대에 찍은 사진입니다. 그런데 조선고적도보에는 없는 사진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사진입니다.

 

▼ 화성의 봉수대였던 봉돈입니다. 자세히 보면 봉돈 내부로 드나드는 홍예문이 보입니다.

 

▼ 첫번째 사진과는 다르게 측면이 허물어졌습니다.

 

▼ 일본인 셋이서 조사를 멈추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이들이 조선고적도보를 만든 일본인들 인듯 합니다. 조선의 문화수탈를 위해서 만든 고적도보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문화재 가치가 있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 서장대의 모습을 보니 국권을 빼앗긴 나라를 보는듯 합니다. 왼쪽 옆에 서노대의 일부가 보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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