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현등사는 수려한 산세를 가진 운악산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사찰입니다. 신라시대 때(법흥왕 27년, 540년) 창건을 하기는 했지만, 작은 암자 정도로 있다가, 고려 효공왕 2년(898년) 때 옛 절터에 다시 절을 지었으나, 그때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고려 희종 6년(1210년)에 보조국사가 절터에 다시 절을 지었는데, 그때 현등사라고 이름을 지은 듯합니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불에 타 버리고 또 짓고, 수리를 하면서 긴 세월을 자리를 지켰지만 6.25 전쟁통에 또 불에 타버리는 등 훼손이 되었지만, 1961년도에서 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84년 극락전을 중수하였고, 1987년에는 대규모 불사로 보광전·지장전·삼성각 등을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 현등사 일주문의 사진이 없어서 자료사진으로 대신 합니다.
▼ [자료사진] 운악산 자락에 자리 잡은 현등사
▼ [자료:e-뮤지엄] 일제강점기 때의 현등사입니다. 지진탑도 보이고, 삼층석탑도 보입니다.
▼ 현등사는 일주문에서부터 걸어 올라가면 무척 힘들기 때문에 중간쯤에 주차하고 걸어 올라갑니다. 중간 즈음에 널찍한 바위로 흘러내리는 물이 폭포가 보이는데, 경사진 바위면 상단에 민영환(閔永煥)의 암각서가 있습니다.
구한말 민씨일가는 부정부패한 관리, 변절자들이 많았는데, 그래도 민영환 선생은 다른 민씨들과는 달리 망해가는 나라에 대한 우국충정이 있었습니다
▼ 민영환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직후, 일제의 내정 간섭을 비판하며 조약 파기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905년 11월 30일 동 틀 무렵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서 순국하였습니다. 민씨(여흥민씨)중에는 친일로 나라를 말아먹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래도 민영환은 다른 민씨들과는 달랐던 모양입니다
▼ 계단과 불이문이 보이는데, 옛날에는 이 계단으로 다녔던 길이었습니다.
▼ 불이문을 지나면 보광전이 올려다 보입니다
▼ 보광전으로 올라가는 길옆에 지진탑이 있습니다.
▼ 지진탑을 지나서 삼층석탑 앞에서 보는 현등사입니다. 탑은 삼층석탑이라고 하는데,, 갑석이 반전이 있어서 마치 옥개석처럼 보입니다.
▼ 현등사 안내도입니다.
▼ 현등사의 특이한 건물입니다. 좌익루, 우익루 형태의 건물로 된 절집은 현등사뿐인 줄 압니다.
▼ [자료:e-뮤지엄] 일제강점기 때의 보광전입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보광전 앞의 계단이 바뀌었습니다
▼ [자료:공유마당] 1971년의 보광전입니다.
▼ 어느 전통사찰이나 보수하는 곳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영산보전이 보수작업 중입니다
▼ [자료] 자료사진으로 보는 만월보전과 영산보전입니다. 이 두 건물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고 기존 절터에 추가로 지은 건물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 사진을 보면 산신각(삼성각)까지만 보입니다.
▼ 화려한 누각으로 지어진 만월보전입니다. 마치 목조탑처럼 보입니다
▼ 약사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 삼성각은 겉 보습만 보고 지나칩니다.
▼ 극락전도 보수 중이라 어수선합니다,
▼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 길은 바위에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 [자료사진] 예전의 적멸보궁입니다. 지금은 좀 넓어졌습니다.
▼ 창을 내고 삼층석탑을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 적멸보궁 뒤에 있는 탑은 현등사 삼층석탑을 복제한 탑입니다.
▼ 적멸보궁에서 보는 현등사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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