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북한산성에서 태고사까지 계곡길의 풍경사진이며, 단풍구경을 하러 갔는데, 가끔 사적지에 대한 자료사진과 약간의 설명을 달았습니다.
▼ 수문과 이어지던 성곽은 등산로에서 일단 마무리 되었습니다. 여기가 첫 번째 수문지이고, 두 번째 수문지는 중성문 옆에 있습니다.
▼ 서암사(西巖寺)는 조선 숙종 37년(1711년) 때에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된 13개 사찰들 중 하나입니다. 수문 일대의 산성 수비 역할을 담당하다가 19세기 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는 절을 다시 일으키는 불사(佛事)를 하고 있습니다.
▼ 중성문입니다
▼ 중성문 안내판이 보기 어려워서 옮겨 보았습니다
북한산의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의 협곡에 쌓은 중성(重城)에 설치된 성문이다. 대서문에서 이곳에 이르는 지역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해 적의 공격에 취약한 구역이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곳에 적의 공격을 이중으로 방어할 수 있는 차단성(遮斷城)인 중성을 쌓았다.
중성 안쪽은 북한산성의 내성(內城)에 해당되는데, 이 내성에 행궁·중흥사·상창 등의 주요 시설이 집중되어 있었다. 중성의 수비를 담당했던 군부대는 대서문과 대남문의 수비를 맡았던 어영청 유영이 현재의 중성문은 석축 기단인 육축부, 그 위에 올려진 문루, 무지개 모양의 중성문은 석축 기단인 육축부, 그 위에 올려진 문루, 무지개 모양의 출입구인 홍예문을 갖춘 전형적인 대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홍예 양쪽에 문루의 배수시설인 누혈(漏血)이 하나씩 설치돼 있다.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길과 장군목을 걸쳤던 방형의 구멍이 남아있다.
규모는 대서문보다 조금 작은 편이다. 문루는 1998년 복원했는데, 1958년에 복원한 대서문의 문루보다 40년이 늦어 복원기술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중성문 옆의 암반에 폭 2.2m, 높이 1.8m 규모의 작은 암문(暗門)이 숨겨져 있다. 이 암문은 원래 이름이 없었으나 성 안에서 생긴 시신(屍身)이 중성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이 문을 통해 나간다고 해 '시구문(屍軀門)'이라 불렸다. 한편, 중성문 바로 옆을 흐르는 계곡에는 수문이 설치돼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자료사진:오마이뉴스] 중성문은 북한산성의 가운데로 지나는 계곡이 평탄한 지역이어서 지리적으로 취약함을 없애고자 쌓은 중성의 문이었습니다
▼ 중성문 옆의 암반에 덧대어 만든 시구문(屍軀門)입니다. 시신은 중성문을 통해서 나가지 못하게 시구문을 만든것으로 보입니다.
[자료사진:경향신문] 1911년의 중성문의 모습입니다. 문루는 없어졌지만, 시구문 위로는 성곽이 보입니다.
[자료사진] 중성문옆의 계곡길과 수문은 흔적도 없는 모습입니다. 1900년 초의 사진으로 보입니다.
▼ 중성문의 암벽 사이로 시구문이 만들어졌으며, 문짝을 달았던 흔적(지도리)이 있습니다
▼ 시구문 옆 암반과 연결된 수문이 있었으나, 언젠가 홍수에 휩쓸려 없어졌습니다
▼ 1907년 독일군 무관(장교) 헤르만 산더가 찍은 중성, 시구문과 성곽이 잘 보입니다.
▼ 중성문은 여러번 다시 지어졌습니다.
▼ [자료사진:국립민속박물관] 1907년 독일장교 헤르만 산더가 찍은 북한산성 선정비군과 산영루지
▼ 최근에 복원된 산영루입니다.
▼ [자료사진] 신영루의 자료사진을 시대별로 보겠습니다.
▼ 중흥사는 북한산성 내의 승영 사찰(사찰 11곳, 암자 2곳)과 승병 350여 명을 관리하고 지휘하던 승군 사령부가 있던 사찰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고려 시대에서부터 존재하였습니다. 1915년 홍수로 인해 무너진 후 폐사지 상태였다가 2012년부터 대웅전과 요사채를 복원하였습니다.
▼ [자료사진:문화재청,e뮤지엄] 1910년대의 사진으로 추정되는 중흥사의 옛 모습입니다.
▼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중흥사
▼ [자료사진:불광미디어] 복원사업으로 다시 지어진 중흥사의 모습입니다.
▼ 중흥사 앞에 있었던 중창터이며, 북한산성 내의 7개 창고 중 하나이며, 식량과 무기를 저장했다고 합니다.
▼ 어느덧 목적지 태고사 앞에 왔습니다.
▼ 보우(普愚)가 1341년(충혜왕 복위 2) 삼각산(북한산) 중흥사(重興寺)의 주지로 임직 하면서 개인의 수도처로서 창건한 후 동암(東庵)이라 하였다. 태고암이라 부르게 된 것은 보우가 입적한 후부터라고 하며, 그는 이곳에서 「태고암가(太古庵歌)」 등 매우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 뒤 수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쳐 명맥을 이어오다가 6·25 때 완전히 부서져서 절터만 남았던 것을 최근에 대웅전과 원증국사탑비각 및 산신각을 복원하였다._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대웅전 앞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태고사에서 내려 올 때는 대서문으로 통하는 길로 내려 왔습니다.
▼ [자료사진] 1902년의 모습입니다
▼ 1907년 독일군 장교 헤르만산더가 찍은 대서문입니다.
▼ 문루가 무너져 내린 대서문입니다.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 복원된 대서문앞의 이승만 전 대통령입니다
▼ 한때는 대서문으로 버스가 드나 들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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