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에 이궁[離宮;임금이 왕궁밖에 머물던 다른궁]으로 지어진 궁입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40년(1607)에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시작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인용하였습니다(이하 포함)
▼ 돈화문옆의 공사장 가림막에 창덕궁 일대의 가을 사진이 있길래 담아 보았습니다. 사진에서 돈화문앞을 보면 월대가 보이는데, 다른 궁궐에서는 훼손되거나 여러가지 사유로 복원되지 못하였는데, 유일하게 창덕궁 돈화문앞 에서만 복원이 되었습니다.
▼ 지도에서 보면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창덕궁과 창경궁이 하나의 구역에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고 한답니다.
▼ 창덕궁의 안내자료입니다. 신선원전은 공사중인지 비공개여서 못보고 왔습니다.
▼ 돈화문을 들어서면 다른궁과 달리 한번 꺽어서 궁으로 들어가야 하는 구조입니다.
▼ 이곳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입니다. 돈화(敦化)란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감화시킨다’는 의미로, 덕치를 숭상한 조선 임금(왕조)의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복원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조는 왜 경복궁을 버려두고 창덕궁을 먼저 복원했을까? 긍금합니다. 경복궁은 고종때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복원되었습니다.
▼ 창덕궁은 1997년 12월6일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 올해 처음으로 창덕궁을 가볼때는 4월초였는데, 추가로 볼것이 있어서 한달후에 가보니 회화나무에는 이미 초록색의 나뭇잎이 가득 달렷습니다.
▼ 오래전에 장맛비에 쓰러진 금호문 앞의 회화나무인데, 지지대로 받쳐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 금천교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문으로 사용되는 금호문입니다. 이 금호문 앞에서 1926년 4월 26일 안중근의 후예 송학선의 의거가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를 검으로 처단하려 하였으나, 총독과 비슷한 일본인을 처단하는 바람에 실제 조선 총독은 처단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송학선의 의거는 그 당시 대단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 모든 궁에는 대문을 거쳐서 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금천교를 건너야 합니다. 창덕궁의 금천교는 태종11년(1411년)에 건립된 것으로 서울에 있는 석교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금할 금(禁) 내 천(川)을 써서, ‘아무나 함부로 건널 수 없는 다리’라는 뜻과, 비단 금(錦)자를 써서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다리’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 금천교의 서수들은 오랜세월에 많이도 닳았습니다.
▼ 진선문의 측면에서 보는모습이며, 한복을 입으신분들은 대부분 외국분(동남아)이었습니다
▼ 내병조는 사람들이 들러보는 코스에 없어서 대부분 모르고 지나가는데, 어떤 모습인지 들어가 보았습니다. 창덕궁관리소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 내병조와 돈화문 사이의 건물은 복원한지가 얼마 안되었는데, 현판이 없어서 무슨 용도의 건물인지 모르겟습니다
▼ 이제 궐내각사와 선전원(구)를 둘러보기 위해서 첫번째 문을 찾아서 갑니다.
▼ 규장각과 검서청으로 들어가기 전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거 잘 보고 가야 합니다. 궐내각사를 둘러보다보면, 방향감각이 무뎌져서 제대로 못보고 나올 수 도 있습니다.
▼ 궐내각사를 둘러보기 전에 안내판을 잘 보고 가야 어느정도 이해가 갑니다. 어래 건물배치도에 전각이나, 문의 이름이 빠진것을 추가해 보았습니다
▼ 궐내각사에 들어서면 먼저 내각이라는 글씨가 보이는데, 규장각의 별칭이라고 합니다. 규장각은 정조가 세운 왕실의 도서관으로 정치적으로 나랏일을 연구하던 기관이었습니다.
인조이후에 강화도 행궁에 규장각을 세우고,왕실의 자료들을 보관하였는데, 강화도의 규장각을 외각(外閣)이라 하였으며, 병인양요때 프랑스에 약탈당했습니다. 왕실 가까이에 있는 관서라서 내각이라고 하며, 현재까지 그 기능이 이어져서 행정부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만들어졌는데, 지금 창덕궁의 후원의 주합루에 규장각이 있었으며, 고종때 지금 이곳으로 옯겨졌다고 합니다. 외규규장각(강화도)에 소장되어 있던 책들은 병인양요때 프랑스에 약탈당했고, 내각에 있던 도서들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해방후 서울대학교로 이관 되었는데, 별도로 '서울대학교규장각'이라고 합니다-출처 문화재청
▼ 규장각 뒷편으로는 봉모당으로 들어가는 운한문이며, 닫혀 있는 상태입니다.
▼ 궐내각사 사이로 흐르는 물은 흘러가서 금천교를 지나갑니다. 이물길은 청계천에서 합류하고 북영천이라고 합니다
▼ 규장각의 검서관들이 입직(당직)을 서면서 서적을 점검하던 규장각의 부속건물입니다. 검서관4명이 번갈아서 입직을 했는데, 임금의 갑작스러운 하문에 대비해서 밤을 새우던 곳이며, 원래는 대유재였으며, 순종때 검서청이라고 바꾸어 부른것이라고 합니다.
▼ 검서청뒤로 나가는 문은 봉모당과 책고로 가는 문이며, 문의 이름은 없습니다
▼ 봉모당은 규장각의 역대 선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곳 입니다. 문은 잠겨져 있습니다.
▼ 봉모당으로 들어 가는 길은 궐내각사에서는 없고, 후원에서 나오는 길옆에 있습니다. 봉모당 옆에 있는 향나무는 750년이나 되었답니다. 선원전이 제례에 관련된 전각이므로 제례때 향을 피울때 쓰던 향나무 인것으로 보입니다.
▼ 책고는 봉모당 뒷쪽으로 세채가 있으며, 규장각의 책을 보관하던 서고로 보입니다.
▼ 처마밑에 보면 오지창이 보이는데, 새가 앉는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꽂아 놓은것입니다
▼ 정숙문은 선원전의 서쪽문입니다. 억석루는 옛것을 생각한다라는 뜻이며, 내의원에 부속건물입니다.
▼ 이제 옥당(홍문관)으로 들어갑니다. 궐내각사와 선원전의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어서 꼼꼼하게 둘러봐야 합니다.
▼ 옥당은 홍문관의 별칭입니다.
▼ 조선 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옥서(玉署)·영각(瀛閣)·서서원(瑞書院)·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학술적인 관부이면서 사헌부·사간원(司諫院)과 더불어 언론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습니다.
▼ 옥당옆의 2층으로 된 행각내부를 보았는데, 구석진 곳 이라고 허투로 하지 않고, 깔끔하게 복원하였습니다.
▼ 옥당을 나와서 내의원으로 들어갑니다.
▼ 내의원(內醫院)으로서 궁중의 의약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내국(內局)·내약방(內藥房)·약원(藥院) 등으로도 불렸고, 태종 때 내약방으로 설치되었다가 1443(세종 25)년부터 내의원이라고 했습니다. 약방은 인정전 서쪽 행각에 가까이 있는데 이는 임금의 병을 가까이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내의원을 내의사(內醫司), 궁 밖에 있는 의료 기관인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惠民署)를 외의사(外醫司)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약방의 역할을 나타내는 ‘調和御藥(조화어약)’, ‘保護聖躬(보호성궁)’의 현판이 현재는 옛 성정각(誠正閣)의 남쪽 맞은편 건물에 붙어 있고 약절구도 그 마당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적으로 성정각이 내의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종(純宗, 1874~1926년) 때 창덕궁이 개조되면서 내의원이 헐리고, 현판들과 의약 도구들이 옮겨졌다고 하는데, 단순히 도구들만을 옮긴 것이 아니라 이 때 성정각이 내의원의 기능을 맡게 된 듯합니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복원된 것입니다.
▼ 왼쪽은 약방이고, 오른쪽은 약방의 부속건물인지 알 수 없으나, 현판이 걸려 있지는 않았습니다.
▼ 궐내각사에서 인정전으로 통하는 문이며, 잠겨져 있어서 통행 할 수 없는 문입니다.
▼ 영의사라는 건물인데, 현판이 걸려있지는 않습니다. 선원전 앞에 있으며, 영의사(永衣舍)는 아마도 제관들이 머무르던 재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커다란 느티나무가 특징입니다.
▼ 연경문은 선원전의 남쪽행각에 붙어 있는 문입니다.
▼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궁궐 밖으로는 종묘를 두었고, 궁 안에는 선원전을 두었습니다. 원래 춘휘전이란 건물로 조선 효종 7년(1656) 경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은 것으로, 숙종 21년(1695)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곳에는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가.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왕의 초상을 옮긴 뒤부터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긴 왕의 초상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아쉬움을 더 합니다.
▼ 선원전앞의 행각이며, 억석루와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 보춘문은 선원전과 양지당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 양지당은 별도로 문을 가지고 있는데, 남쪽은 만복문, 북쪽은 만수문, 서쪽은 보춘문, 동쪽은 만안문입니다.
▼ 양지(養志)’는 ‘고상한 뜻을 기른다’는 의미와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건물의 기능으로 보아 선원전에 참배(參拜)하기 위해서 임금이 이 곳에 머물며 ‘고상하고 엄숙한 뜻을 배양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 이며 어재실(御齋室)이었던 것 으로 보입니다. 동쪽으로 만안문이 보이는데, 이문은 인정전의 행각에 달려 있습니다.
▼ 양지당 서쪽의 문은 보춘문으로 선원전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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