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의 태실비(태비)의 뒤에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선생의 묘역이 있는데, 묘역에는 연안이씨열녀문과, 연안이씨삼세비,월사집장판각등이 있습니다. 겸사겸사해서 가평여행 때 들려보았습니다.
가평 이정구선생묘(李廷龜先生墓) 및 삼세신도비( 三世神道碑) 경기도 기념물 제79호 (2016.5.4) 경기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115-1 |
※ 월사 이정구선생의 일생을 간략하게 알아보았습니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던 월사(月沙) 이정구(1564∼1635) 선생은 선조 23년(1590)에 병과에 급제한 후 병조·예조·형조판서를 거쳐 인조 6년(1628)에는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죽은 후인 영조 21년(1754)에 특명으로 부조전(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원히 모시는 것)을 하사 받았다.
그는 문장 가문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였고 중국어에 능통하여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웠다. 그는 문장은 장유·이식·신흠과 더불어 ‘한문 4대가’라고 일컬어졌다.
▼ 월사 이정구선생의 묘역을 보면 선생의 제를 받드는 사당인 경덕사(景德祠)가 오른쪽에 있고, 삼세신도비, 정려문, 장판각, 묘역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창대군 태비는 관심이 없으면 찾아보지도 못 할 정 도로 외로이 서 있습니다
▼ 이정구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경덕사 입니다. 경덕사 현판은 사진을 합성하였습니다.
▼ 이정구선생의 묘역을 들어 가려면 정려문을 거쳐서 들어 갑니다.
▼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조정에서 충신, 효자, 효부, 열녀등을 기리기 위해 정려기(旌閭記)를 내리는데, 보통은 마을 어귀에 맞배지붕의 솟을대문을 짓고 정려기를 걸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상징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정려기(旌閭記)를 대문에 걸면, 정려문(旌閭門)이고 독립된 건물 내부에 걸면 정려각((旌閭閣)이라고 하는데, 정려기가 효자에게 내려지면 효자문(효자각), 열녀에게 내려지면 열녀문(열녀각), 효부에게 내려지면 효부문(효부각)이라고도 합니다.
이정구 선생의 정려문에는 세분의 정려기가 걸려 있습니다
▼ 형조참판 현주 이소한(玄洲 李昭漢) 처 정경부인 여주 이씨 정려
▼ 빙현 이조판서 이가상(손자)의 효자정문이다
▼ 효자 이일상(아들)의 처 정경부인 전주이씨의 열녀(烈女) 정려기
▼ 이정구선생 묘로 올라가는 길 옆에는 연안이씨삼세비( 延安李氏三世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왼쪽 부터 아들 문정공 백주 이명한(좌), 문충공 월사 이정구(중), 손자 문숙공 청호 이일상(우)의 신도비입니다. 3대가 이렇게 나란히 신도비가 있는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그것고 3대가 대제학이었다니, 보통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 대제학(大提學)조선시대에 집현전이나, 홍문관이나, 예문관에 소속된 정2품의 관직이었으며, 오늘날의 국립대학교총장 혹은 교육위원회위원장이나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관직
※ 이정구선생의 신도비의 좌,우로 있는 신도비의 자료를 찾아 보면 아들 이명한의 신도비와 손자 이일상의 신도비가 좌,우중에서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 삼세신도비 옆에는 월사 이정구선생의 문집 "월사집(月沙集)"을 간행하기 위하여 만든 목판을 소장하고 있는 장판각(藏板閣)이 있습니다. 내부는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 [자료:가평문화원] 월사집목판을 보관하는 내부와 목판집이 긍금하여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 외교관이며, 문장가였던 이정구선생의 사후 일년 후에 후학 최유해에 의해 문집을 처음 만들었는데, 병자호란때 불타버렸고, 숙종때 다시 만든것이 지금의 월사집목판이라는 설명입니다.
월사 이정구선생은 글솜씨가 꽤 뛰어난 문장가로 오랜세월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 변무주(辨誣奏)에 대한 내용은 그 당시 조선이 처한 현실에 대한 현실과, 변무주에 의한 명나라 정응태를 파직으로 이끈 외교의 중대한 사건이었으므로 좀더 추가 설명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하여 보았습니다.
- 조선 중기에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글. 본래의 제목은 ‘정주사응태참론본국변무주(丁主事應泰參論本國辨誣奏)’이며,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라고도 한다.
- 『월사집 月沙集』 권21의 「무술변무록」에 정문(呈文) 4편과 함께 실려 있다. 이정구가 35세 되던 1598년(선조 31)에 지은 총 3,309자로 된 장문이다.
- 명나라 정응태가 조선이 왜적과 제휴하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고 중국 조정에 무고한 사실을 중국황제에게 변명한 글이며 대략 9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제1단은 서언으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비유하여 조선의 억울한 사정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 제2단은 군신의 정리를 떠난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변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억울한 사정을 나타내었다.
- 제3단은 왜국의 사람들을 꾀어 들인다고 한 내용에 대한 해명이다. 예전부터 왜와 교린우호를 취한 것은 변방을 수호하는 수단이었다. 왜와 함께 중국을 도모하려고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말하였다.
- 제4단에서는 『해동제국기』에 중국연호를 주로 작게 쓴 것은 신숙주(申叔舟) 개인이 여러 나라의 기문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는 큰 의미가 없음을 밝혔다.
- 제5단에서는 조선의 역대군왕이 조(祖)라고 한 것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여 그간의 외람됨을 시인하였다.그 밖의 문물제도를 달리하고 있다고 한 것은 사실과 다름을 설명하였다.
- 제6단에서는 국방에 힘쓴다는 말에 대해 변명하였다.
- 제7단에서는 왜를 불러 옛땅을 회복하려 한다는 말에 대한 해명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중국과 조선이 협력하여 난을 평정하였다.그런데 지금 왜와 중국을 친다는 것은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 제8단에서는 정응태가 무고한 이유를 열거하였다.
- 제9단에서는 결론을 맺었다. 중국의 각료들이 이 주문을 보고 한결같이 ‘좋은 문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변무주」를 통해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보았다.「변무주」는 ‘곡진·간측·온자·전중’하다는 평을 받았다.
선조도 이정구의 문장에 대해 “글이 폐부에서 나오기 때문에 곡진하고 간절하다.”라고 하였다. 『운양만록』·『송천필담』 등에서도 이 글이 ‘천하제일의 문장’이라고 말한 바 있다.이 글은 선조 조의 현안문제를 해결한 외교적 성과 때문에 화국문장의 정종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에 부응하여 저자의 문명을 천하에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변무주(辨誣奏))]
※ 변무주(辨誣奏) : 사리를 따져서 억울하다고 아뢰는 것
▼ 월사집목판각의 뒤로 가면 이정구선생의 묘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묘역은 3기의 무덤이 일렬로 있습니다. 언뜻 보면 3대가 난란히 있는것처럼 보입니다.
▼ 안내판에서 묘의 배치를 보면 위에서 부터,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장자 이명한(李明漢)의 묘, 그 밑에 대제학을 지낸 장손 이일상(李一相)의 묘, 맨 아래에 이정구선생과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의 합장묘가 있습니다.
이렇게 후손의 묘가 위에 있게 된 것은 풍수지리에 의하여, 조상의 순서대로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올 묘 자리라 하여 반대로 묘를 쓰는 역장(易葬)을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 [자료:가평문화원] 이정구선생 3대 묘의 위치를 자료사진에 넣어 보았습니다
▼ 이정구선생의 묘역 앞에서 바라보면 잘 안 보이지만 영창대군의 태실비가 서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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