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연무관(演武館)은 산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무예 연마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요즘의 초급장교급의 무관을 육성하는 역할도 함께 있었던 초급 군사학교이기도 했습니다.

 

연무관에서는 수어청의 군사들을 조련시키기도 하지만, 병역의 의무가 있는 양반집 자재나 사대부 집안 자재들을 대상으로 자질이 있고 성적이 훌륭한 사람을 뽑아 수어사가 추천장을 써 주면 한양에서 무과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무관 양성소 역할도 담당하던 곳이었습니다.

 

▼ 연무관(演武館)으로 올라가는 길옆에는 연무관이 지어질 때부터 함께 했던 나무가 있습니다. 오래된 고목의 안내를 받는 느낌입니다. 연무관은 남한산성을 수축하던 시기인 1625년(인조 3)에 창건되어, 그 직후 1626년에 창설된 중앙 군영인 수어청의 중심 건물로, 1795년 수어청의 경청이 폐지된 이후에는 수어청의 본영이자 광주유수의 집무처로 사용되었습니다.

 

▼ 연무관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이며, 화살표가 연무관입니다.

 

▼ 남한산성은 2014년 6월 22일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1번째이며, 경기도에서는 수원 화성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조선시대의 남한산성은 조선 오군영(五軍營)중에서 수어청에서 방어를 담당하였습니다

오군영은 조선 후기의 다섯 군영을 말하는데, 훈련도감과 후금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그리고 이후에 수도를 방위하기 위해 설치된 금위영을 합쳐 부르는 말인데, 이중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한양도성을, 총융청은 북한산성, 수어청은 남한산성의 방어를 담당했습니다.

 

▼ 연무관 앞 마당에는 조선시대의 병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투석기, 신기전, 중포와 대장군포 등입니다.

 

▼ 연무관(演武館)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호이며, 처음에는 연무당(演武堂)으로 부르던 것을 숙종(재위 1674~1720) 때 수어사(守禦使) 김재호(金在好)로 하여금 개수(改修)하게 하고 연병관(練兵館)이라 쓴 편액(扁額)을 내리었습니다. 정조(正祖)때에는 이를 수어영(守禦營)이라 개칭하였으나 지금은 연무관(練武館)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연무관은 문, 무과 시험을 보는 공개적인 시험 장소였으며, 특히 무기 시연은 물론 주간,야간에 군사훈련을 거행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 창건 이래 세 번에 걸친 중수의 기록이 있으며, 군사시설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 연병장의 넓은 공간에서 국왕이 백성을 직접 대면할 수 있었던 장소로서의 역사적 성격, 연무관 뒤편에는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판관이 근무하던 곳이 있었고 주위에 향청, 작청 등의 관아시설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1779년(정조 3) 정조가 여주 영릉(세종, 효종)을 다녀오는 길에 남한산성에 들렸는데, 당시 국왕이 백성들과 대면하여 노고를 치하하고 지역의 오랜 숙원을 해결해 주었던 장소로서 역사적 가치도 있습니다

※ 1920년대의 일제강점기 때의 유리건판 사진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지금도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을 부분 확대하여 보면 연무관이 보이며, 연무관 앞에는 커다란 공터가 보이는데,  연병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연무관(演武館)은 조선 시대의 군사시설로 무기 시범은 물론 문무관(文武官) 시험, 야간 군사훈련 등의 행사를 거행했던 장소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1779년(정조3) 정조가 여주 영릉(효종,세종릉)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한산성에 들렸는데,  정조가 연병관에 나아가 직접 문사(文士)ㆍ무사(武士)의 시험을 관장하였고, 무술시합과 홍이포 시범을 지켜보았으며, 음식을 마련하여 군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건축적 특징을 보면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정면과 배면에 퇴칸을 두고 있으며 좌・우측에도 퇴보를 설치하여 구성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연무관이 군사시설로 사용된 관영 건축으로 중앙부에서 기둥을 후면으로 이주하여 벽을 세우고, 국왕이나 수어사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한 것과 초익공을 사용한 공포의 의장형태나 단청에서 소박하지만 대량 계풍에 용을 그려 넣어 장엄을 위하여 조식한 점이다. 특히 기둥을 보호하면서 건물의 위용을 나타내는 주련은 기둥보다 더 큰 나무를 사용하여 기둥 외부를 완전하게 감싸도록 하였다._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연무관(演武館) 주련(柱聯)에 대한 해석을 자료에서 알아보았습니다(블로그, 청출목수)


玉壘金城萬仞山 (옥루금성만인산) : 만 길 높은 산 옥 같은 보루와 철벽 같은 산성에
風雲龍虎生奇力 (풍운용호생기력) : 구름을 부르는 용처럼, 바람을 일으키는 호랑이 같은 기력이 서려있네
角羽宮商動界林 (각우궁상동계림) : 군악 소리에 계림이 일렁이고
密傳蔥本空三本 (밀전총본공삼본) : 은밀한 전갈에 보내니 삼본을 다 비우네



▼ 1930년대의 연무관입니다만, 사진이 흐려서인지 주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 현판의 글씨가 쓰인 시기를 알아보았는데, 崇禎紀元後三壬年四月 日改摸書(숭정기원후삼임년사월 일개모서)라고 쓰여 있습니다.

 

※숭정제(崇禎: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16대 의종의 연호) 세 번째 임오년(壬午年) 4월 일에 새로 현판(懸板)을 썼다는 뜻인데, 영조(英祖) 38년(1762)에 해당합니다.

 

※ 숭정 기원후 삼 임오년(崇禎紀元後三壬年)은 명나라가 망한 지 118년이 되고 서기 1762년입니다.​

 

영조(英祖) 38년이면, 사도세자가 창경궁 휘령전 앞에서 뒤주에 갇혀서 죽은 날이었습니다.

 

※ 청의 연호로는 건륭제 27년인데, 조선은 공공연히 청에게 굴복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명나라를 숭배하는 배청숭명(背淸崇明) 사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명나라의 유교사상은 우리 주위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좋은 것은 남기고 쓸데없는 허울은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 주초는 흔히 보던 장방형이 아닌 반 기둥식입니다. 아주 튼튼하게 생겼습니다. 앞으로도 1000년은 가겠습니다

 

▼ [자료:경기문화재연구원] 연무관을 복원하기 전의 주초 모습입니다

 

▼ 측면을 보면 3칸 + 1칸(퇴)으로 되어 있는 구조인데 퇴는 활쏘기 공간이었습니다.

 

▼ 가운데 주초가 하나 비어 있는데, 연무관을 복원하면서 굳이 기둥을 세울 필요가 없었는가 봅니다. 그리고 여기서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양반집 자재 외에도 일반 군졸들에게도 일 년에 한 번 정도 실력을 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활쏘기 실력이 월등한 군졸은 다른 군졸보다 높은 직위가 수여됐다는 기록도 있다"라고 전합니다.

 

▼ 이아터(貳衙址)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연무관 뒤에 있었는데, 남한산성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내용을 보면,  "이아(夷衙)는 제승헌(制勝軒)이라고 하였으며, 영조(英祖) 24년 (1748) 이후 연무관(演武館) 근처에 자리 잡은 행정관청의 중심지였다. 이 안에 있었던 작청(作廳)은 실무를 담당하는 중간 관리층인 이방(吏房)과 아전(衙前)들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었다".

 

▼ [자료:경기문화재연구원] 연무관터와 이아터를 발굴 조사하는 공중사진인데, 연무관 뒤의 행정관청의 터가 무척 크게 보이는 것을 보아서 조선시대에 연무관 뒤가 행정의 중심지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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