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가 조선땅의 본격적인 강점이 되는해의 기준이 1910년입니다. 1910년 이민1세로 수원에 정착한 저술가 사카이 마사노스케(酒井政之助)는 1914년 발전하는 수원(發展せる水原)이라는 책을 발간하였습니다.1915년에는 화성지영(華城乃影), 1923년에는 수원이라는 저서를 남겼는데, 수원(水原)의 책에 수록된 사진을 올려 보았습니다. "발전하는 수원(發展世る水原)"의 책의 사진이 여러장이 중복되기도 합니다. 사진의 촬영시기는 추정해 보면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에 찍은것으로 보입니다.
- 출처는 수원박물관에서 발행한 자료이며, 사진자료는 국회도서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수원이라는 책의 표지입니다. 창룡문의 사진인데 자세히 보면 성가퀴가 일부 무너진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사카이마사노스케(酒井政之助-저술가)입니다
▼ 경부선 개통후 초기 수원역의 내 일부 모습입니다. 수원역은 다른 지역의 일반역보다는 규모가 큰 역이었습니다
▼ 수원역 앞에서 바라보는 지금의 매산로 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지금의 매산로가 번화가이며,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물론 일본인들이 만든 거리였습니다. 해방후에 지금의 신도로가 만들어 지면서 4차선 도로가 되었고 다만 교통흐름이 좋아지고 일부 대형 건물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한동안은 구도로인 매산로가 수원의 경제 중심지 노릇을 하였고 지금도 그때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 지금의 어느 위치에 있었던 회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산농사 조선지점이 수원에 있는것만으로도 농업행정의 중심지는 수원이었던것 같습니다
▼ 역전통의 양복점 사진인데, 그때의 역전통은 지금의 매산로입니다
▼ 식산은행은 조선의 경제침탈을 목적으로 만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함께 조선의 경제지배의 축이었습니다. 해방후에 퍠쇠되었다가 1954년 한국산업은행으로 재 탄생되었습니다.
▼ 지금의 매산초등학교의 전신인 수원심상고등소학교입니다. 일본인들이 1900년대에 일본인 이민자들이 많아지면서 일본인 아이들 전용학교로 1906년에 수원화성학교에서 개교하였고, 학생수가 많아지면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습니다. 학교뒤에 보이는 건물이 일본인들의 수원신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 팔달산자락의 수원매산초등학교 뒷 부근에 있었다던 수원신사입니다. 수원신사 자리는 지금 수원시민회관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는 전국에 일본인들의 신사가 많았습니다. 다른것은 몰라도 신사는 전부 없애야 하는데, 근대문화유산이라고 복원해야 한다는 소리에는 절대 반대입니다.
▼ 종묘상 카야마(香山) 상점인데, 위치는 모르겟습니다
▼ 수원에도 발전소가 있었습니다. 엔진에 발전기를 연결하여 발전하는 발전소였습니다.
▼ 한우인듯 보이는데, 아마도 일본인들이 소를 개량한듯 합니다. 우리 고유의 한우는 흑우(黑牛)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 팔달문안의 모습인데, 팔달문 위에서 찍은 모습인듯 합니다.
▼ 아오키 미곡상의 정미소라는데, 지금의 장안문 안쪽의 수원농협중앙회가 있는 자리인듯 합니다.
▼ 팔달문밖의 모습입니다.1920년대로 보입니다.
▼ 팔달문 위에서 바라보는 모습인데 장안문 방향으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수원공회당과 수원면사무소라는데, 수원공회당이 무슨일을 했는지는 좀더 알아보겟습니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팔달문 위에서 남수문 방향으로 찍은것입니다.
▼ 한성은행수원지점 건물모습니다.한성은행은 1897년서울에 설립되었던 민족계의 근대적 은행이었지만, 일제강점기가 깊어지면서 일본의 조선식산은행에 인수되면서 실질적으로 일본의 은행이 되었습니다.
▼ 수원우편국 건물모습인데, 지금의 화성행궁 자리에 있었던 건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 신풍루의 모습입니다. 사진설명에 자혜의원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 수원토목관구 건물인데, 오른쪽 문기둥에 수원군청이라는 문패가 희미하게 보입니다, 토목관구는 예전의 한국토지공사라는 공기업의 일을 하는곳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토목관구와 수원군청자리는 화성행궁 남군영 자리입니다.
▼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의 건물모습입니다.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알아봐야겠습니다.
▼ 화령전 안쪽에 이런 노송이 있었다니 ...
▼ 화령전의 풍화당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사진상으로는 운한각과 이안청만 보입니다. 풍화당은 보이지는 아노지만 사진상으로 오른쪽에 있습니다.
▼ 수원신풍초등학교의 전신인 수원공립보통학교입니다. 수원신풍초등학교는 지금은 수원 이의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입니다.
▼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연무대 건물이 온전한 모습이었습니다
▼ 장안문 밖에서 찍은 모습입니다.
▼ 예나 지금이나 화서문의 사진은 이 장소에서 많이 찍었습니다.
▼ 북지(北池)라는 곳인데, 낚시하는 일본인들 낚시를 하고 있습니다. 북지(北池)라는 지명은 지금의 장안문과 화서문의 중간쯤에 있는 배수연못인데, 비가 많이 오면 성 안의 물이 모여서 성 밖으로 물이 빠지는 연못입니다. 사진을 보면 성곽이 보이고, 소나무가 성각을 따라서 서 있습니다. 수원화성에는 두곳의 배수 연못이 있었는데, 북지(화서문과 장안문 중간)와 남지(팔달문 옆:서장대 올라가는길 옆)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메꾸어져 있습니다
▼ 지지대고개 비각입니다.
▼ 서호(축만제)입니다.
▼ 서호의 여수로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엄청납니다
▼ 지금의 서호옆에 있던 농촌진흥청(이전)의 전신인 모범권업장입니다.
▼ 수원고등농림학교는 지금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교의 전신인데, 지금의 수원농고와는 다른 학교라고 합니다
▼ 잠업시험소의 사진인데, 권업모범장이 상급부서로 서둔동에 위치하였다고 합니다
▼ 관인여자잠업강습소인데, 수원모범권업소에 있었던 건물인듯 합니다. 부녀자의 잠업상습을 맡았던 학습기관인듯 합니다.
▼ 국무합명회사(國武合名會社) 조선지부 건물인데, 정확히 무슨 일을 하던곳이지는 좀더 알아보게습니다.
▼ 원래 위치가 지금은 수원비행장 안에 있는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는 대황교입니다. 정조가 화산의 현릉원(지금의 융릉)에 참배하러 갈때 이 대황교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대황교가 홍수때 파괴되었는데, 유구들을 모아서 지금의 융릉앞에 금천교로 만들어서 복원하였습니다.
▼ 융릉앞에 금천교가 있는데, 이 다리가 원래의 금천교입니다만, 규모는 원래의 금천교보다는 작은듯이 보입니다.
▼ 말목장인데 이왕직목장이라고 설명이 있습니다. 이왕직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李王家)와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인데, 일제는 대한제국황실을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켰습니다
▼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어릉 이라는 설명인데, 지금의 융릉입니다
▼ 금융조합은 대한제국 때에 설립된 서민금융기관으로 1907년에 설립되어 1956년 7월에 대한민국의 농업은행의 모체가 된 서민금융기관으로 신협과 비슷한 성격이라고 합니다.
▼ 수원의 부국원입니다.일제강점기의 종자·종묘 회사로 농업 수탈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건물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 수원의 화성내에 있는 일본 요리점의 사진들입니다
- 끝 -
'▣ 마음으로 가는길 > 수원의 옛날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원의 옛날사진[11]-미군(美軍)이 본 수원화성(2부) (0) | 2019.04.20 |
---|---|
수원의 옛날사진[10]-미군(美軍)이 본 수원화성(1부) (0) | 2019.04.19 |
수원의 옛날사진(8)-발전하는 수원(사카이마사노스케) (0) | 2019.04.17 |
수원의 옛날사진[7]-엽서로 보는 옛 수원명소 (1) | 2019.04.16 |
수원의 옛날사진[6]-엽서로 보는 옛 수원화성 (0) | 2019.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