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농업박물관은 농촌진흥청(수원)이 2014년 전주 혁신도시로 이전하면서, 남은 빈자리에 세워진 박물관으로서 2022년 12월에 문을 열었습니다. 

 

주요 시설로는 본관(농업관, 어린이박물관, 식물원, 수직농장)과 별관(식문화관,교육관) 그리고 야외 체험시설(다랑이 논·, 과수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농업관(1관, 2관)의 전시물 위주로 꾸며져 있으며, 주로 농기구등으로 친근한 농기구등을 보면서, 힘들었던 농사일을 다시 한번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 국립농업박물관은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있어서 접근성이 매우 좋으며, 들어가는 길에 거대한 장승을 만나게 됩니다.

 

▼ 농업관 본관의 로비모습입니다. 평일이라서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 농업관(1)의 입구입니다. 관심 있게 보면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전시관입니다.

 

▼ 농업관(1)의 입구에는 거대한 화면에서 여러 가지 사진을 번갈아 보여줍니다.

 

▼ 우리나라의 땅은 산이 70%이므로, 산간지역은 지형에 맞게 농업이 발달하였습니다

 

▼ 처음으로 만나는 부스(Booth)는 '땅과 물'의 주제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 조선백자에 새겨진 벼의 모습이며,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도자기입니다.

 

▼ 농사에서 중요한 요소인 씨앗의 보관과 종자의 개발사업등에 전시 부스입니다.

 

▼ 호박의 속을 파내고 바짝 말려서 그 속에 종자를 보관하는 뒤웅박이며, 쥐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끈을 달아서 처마에 매달았습니다.

 

▼ 종자주권은 매우 중요한 우리 식량주권의 뿌리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 한국을 뒤흔든 IMF 때에는 종자회사까지 외국에 팔았는데, 그때 왜 종자회사까지 헐값에 팔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IMF때 팔아치운 종자회사는 흥농종묘, 중앙종묘, 서울종묘, 청원종묘등이 있었는데, 그때 매각을 주도했던 관리들은 식량주권에 너무 지식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의 종자회사를 탐내던 외국회사는 이제 막대한 종자 로열티를 챙기고 있습니다.

 

▼ 세계 각국은 핵전쟁, 자연재해등에 대비해서 종자를 보관하는 지하창고를 운영하는데, 우리나라는 경북 봉화군의 백두대간수목원의  지하 40미터 땅속에 -18℃로 종자를 보관하는 종자보관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한때는 통일벼 다음으로 전국에서 재배를 많이 했었던 아끼바래(추청벼)의 볍씨인데, 아직도 일부 농민들이 좋아하는 볍씨입니다, 볏대가 튼튼해서 잘 쓰러지지 않고, 비교적 병충해에 강하였으며, 밥맛이 좋았습니다.

지금은 국내에서 개발된 밥맛이 좋은 품종들이 많아서 이제는 점차 사라지는 품종입니다.

 

▼ 벼농사에 물을 절대적인데, 우리 조상들은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많은 힘을 쏟았는데, 대표적인 저수지는 벽골제(김제), 의림지(제천), 수산제(밀양)등이 있었습니다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제천의 의림지 뿐 입니다.

옛날에는 논마다 작은 저수지인 둠벙(웅덩이)을 파고, 가물 때 물을 퍼서 논에 물을 대고는 하였습니다만, 이제 거의 사라졌습니다.

 

▼ 벽골제의 제방을 쌓는 방법을 재현하였는데,  자세히 보면 나무상자 안에 흙을 넣고 다져서 제방을 쌓는 판축식 공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백제는 토성를 쌓을때 판축식공법을 잘 이용한 나라였습니다. 판축식공법을 사용하여 1000년을 견딘 한성백제 몽촌토성이 있습니다.

 

▼ 수원은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농업발전의 중심지였습니다.

 

▼ 서유구선생은 농학을 대대로 전수하던 집안에서 태어 았으며,  1790년(정조 14) 문과에 급제한 후 정조의 뜻에 따라 농업에 대한 개혁 정책을 펼치는 관리였으나, 정조 사망 후에 작은 아버지 서형수의 귀양으로 가문이 몰락하자 홍문관 부제학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18년간(1806~1824) 아들 서우보(徐宇輔)의 도움을 받으며《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를 저술하여 113권 52책의  '조선의 농업과 일상생활의 경제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방대한 저술을 완성하였습니다. 

서유구선생의 초상화는 누가 그렸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 농지의 경작 및 농기구 부스에 왔습니다.

 

▼ 지게에 얹혀 있는 것은 장군(분뇨를 옮겨 담는 항아리)입니다.

 

▼ 농지에 거름을 주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삼태기는 거름을 담아서 논밭에 뿌릴 때 쓰였으며, 쇠거름대는 퇴비를 덜어서 논 밭에 뿌릴때 쓰던 농기구입니다.

 

귀때동이, 장군, 분뇨바가지등은 뒷간에서 배설물을 담았던 도구들입니다. 이제는 전부 사라졌습니다

 

▼ 갈이 농기구 중에서 따비를 보여 주는데, 이 따비는 주로 산간지역의 비탈밭에서 주로 쓰던 농기구이며, 돌이 많았던 밭에서 주로 사용하였으며, 사람이 혼자서 쓰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 따비의 끝에는 돌을 파내기 좋게 쇠를 두르고 집게발처럼 생겼습니다만, 사람의 힘으로 밭을 개간하였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 밭을 경작하는데 필요한 농기구들이 진화한 순서대로 따비, 곡젱이, 쟁기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 따비에서 진화한 극젱이이며 쟁기와 비슷하지만, 극젱이는 주로 경사진 밭에서 시람의 힘으로 사용되었으며, 쟁기는 주로 소의 힘으로 사용하였습니다.

 

▼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는 '겨리'라고 합니다

 

▼ 쟁기체험 부스인데, 쟁기를 밀면 화면에서 쟁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보여 줍니다.

 

▼ 농지(논, 밭)를 삶고, 고르는 농기구들입니다.

 

▼ 고써레는 골-써레라는 말로써 주로 밭에서 사람의 끌면서 골을 만들던 농기구입니다.

 

▼ 써레는 쟁기로 갈아 놓았던 논에 물을 대고, 흙덩어리를 잘게 부수는 농기구입니다. 소에 매달고 천천히 돌아다니면 흙이 부서집니다. 소 두 마리로 논을 가는 쟁기는 '겨리'라고 합니다

 

▼ 현대화된 농기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국은 1970년대 초반부터 경지정리사업을 통해서 농기계를 이용한 농업을 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이후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1차, 2차 농업기계화 5개년 계획을 통해서 꾸준히 농기구를 기계화하면서, 골병드는 농사는 이제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으며, 농촌에서 급격한 인구가 줄었어도 쌀의 자급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 볍씨를 파종하는 기계와 이앙기입니다. 이앙기는 농부의 모내기 고통을 날려버린 꿈의 기계였으며, 수십 명이 논바닥에서 며칠을 힘들게 모를 내던 일을 하루에 단 1대로 해 치운 고마운 농기계입니다

 

▼ 보통 콤바인이라고 하는 이 기계는 이앙기와 함께 농부의 고통을 날려버린 고마운 기계입니다. 아마도 낫을 들고 벼를 베어본 사람은 벼를 베고, 볏단을 나르고, 벼를 터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콤바인은 벼를 베는 것부터 탈곡까지 논바닥에서 한꺼번에 해치우는 벼농사에는 탱크 같은 존재입니다

 

▼ 논에 물대는 일은 모를 내고 나서 부터 농부의 중요한 일과였습니다. 여러 가지 물대는 농기구를 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부터 경지정리사업을 통해서 수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물을 대는 고통에서 점차 벗어났습니다

 

▼ 살포는 논을 관리하는 우두머리들이 주로 쓰던 농기구인데, 2~3미터의 길이에 작은 삽날을 달았으며, 물꼬를 만지는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맞두레는 주로 둠벙에서 물을 떠 올릴 때 쓰는 농기구입니다. 지금도 가끔 물대기 어려운 논에는 쓸 수도 있습니다.

 

▼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새벽에 아버지 하고 논에서 1시간 정도 맞두레로 물을 퍼 올리고, 그 길로 학교에 갔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 무자위는 일반 논에서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고, 염전에서 주로 사용했으며, 용두레는 삼각대만 세우고 물을 퍼 올리는데, 주로 높낮이가 얕은 논에서만 사용했습니다. 힘 조절만 잘하면 힘들지 않게 많은 물을 퍼 올립니다

 

▼ 가래는 최소한 3명 또는 5명이 한조가 돼서 흙을 퍼 나르는 도구이며, 동네에서 공동작업 때 많이 사용했습니다.

 

▼ 씨를 뿌리는 파종 농기구입니다.

 

▼ 파종이 끝나면 먹을 것이 없어서 보리가 익을 때까지의 기간을 보릿고개라고 하는데, 배가 고파서 익지도 않은 보리를 꺾어서 볏짚에 몰래 구워 먹었는데, 맛이 고소하던 기억이 납니다. 

 

1970년대로 기억을 하는데, 쌀을 아껴서 먹어도 어려운 때인데, 한 움큼씩 아끼라고 작은 항아리를 부엌 한편에 놓았습니다

 

▼ 농부의 하루는 잠시라도 쉴틈이 없이 살아야 하는 힘든 일의 연속이었는데, 김매기와 병충해와의 싸움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 분무기는 약 50리터 정도의 물이 담기는데, 펌프질을 하면서 논이나 밭에서 농약을 뿌릴 때 주로 사용했으며, 어깨가 빠져나가는 고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런 분무기는 지금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배터리로 작동하는 제품도 있습니다

 

▼ 선조들이 사용했던 비료는 주로 퇴비, 인분등이었으나, 1970년부터 비료공장에서 비료가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인분이나, 퇴비는 점차 사라졌습니다.

 

▼ 볏짚을 태운 재를 모아서 퇴비로 사용했는데, 재를 모아 두었다가 쟁기로 땅을 갈기 전에 미리 뿌리기도 했습니다.

 

▼ 가을에 일년 농사를 마무리하는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농기구들입니다. 옥수수 탈곡기는 처음 봅니다만, 개상, 홀태등은 아주 익숙한 벼를 터는 도구였습니다

 

▼ 도리깨는 최근까지도 시골에 가면 보던 농기구였습니다. 도리깨는 주로 밭에서 콩이나, 깨 등을 떨었습니다

 

▼ 개상은 우리 선조들이 원시적부터 오랫동안 사용하던 농작물을 털던 농기구였습니다. 어릴 적에는 절구를 옆으로 눕혀 놓고 벼를 털었던 기억이 납니다.

 

▼ 이 탈곡기도 일제강점기 때 들여왔으며, 탈곡성능이 좋아서 2명~3명이 돌아가면서 볏단을 들고 털었으며, 가끔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도 생겼습니다

 

우리집의 탈곡기는 나중에 전기모터를 벨트로 연결해서 벼를 털었는데, 내가 어릴 적부터 나는 볏단을 내리고 풀고, 아버지는 벼를 털고, 엄마는 볏단을 묶었는데,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어서 지금도 머리가 절레절레 해집니다

 

▼ 벼를 털고 나면 벼에서 지푸라기들을 걸러내는 작업을 할 때 쓰는 바람개비이며, 집집마다 한대씩 있었으며, 사람이 핸들을 돌려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벼는 물론, 각종 곡식등의 이물질을 날릴 때도 썼습니다. 이것도 힘들어서 나중에는 전기모터에 바람개비를 달아서 뒤집어 놓은 절구통 위에 놓고 썼습니다.

 

▼ 키는 곡식의 작은 돌이나 이물질 등을 거를 때 쓰는 도구이며, 보통 키를 까분다고 했으며, 지금도 웬만한 시골 어르신들은 키로 곡식의 이물질을 잘 걸러 내십니다.

 

우리 아들놈 어질 적 오줌 쌀 때 키를 씌워서 이웃집에 소금을 얻어 오라고 하던 때가 생각이 나네요...

 

▼ 볏짚으로 만든 동그란 것은 '똬리' 라고 하는데, 우리 어머니들이 머리에 무거운 물건을 올릴 때 물건의 중심을 잡고 머리가 아프지 않게 쿠션역할을 하던 아주 중요한 도구이며, 머리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가느다란 끈을 달고, 입으로 물었습니다.

 

보통 뱀들이 동그랗게 하고 있으면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 어머니들이 쓰던 똬리에서 생긴 말입니다

 

▼ 경직도는 농부가 농사를 짓거나 아낙들이 누에를 치는 일, 베를 짜는 일들의 행위를 그린 그림이며, 농부들의 어려움을 알게 해 주려고 그린 그림입니다

- 농업관(1)-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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