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홍제천 옆에 丁(T)자 구조의 자그마한 정자인 세검정(洗劍亭)이 서 있습니다. 냇가로 툭 튀어나온 암반 위에 날아 갈듯이 서 있고, 바로 아래에는 냇물이 흘러서 기가 막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검정(洗劍亭)은 일제강점기 1941년 근처의 종이공장 화재로 주초석 모두 타버려서 1977년 서울시에서 복원한 정자입니다.

 

이 세검정(洗劍亭)은 한자 그대로 풀어 보면, 칼을 씻는다는 정자로 풀이가 되는데, 인조반정(1623년) 거사 전에 몇 사람이 모여서 칼을 씻었다는 곳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여러 자료들을 보면, 이 세검정은 연산군 때 근처의 탕춘대가 있어서 만들어진 정자였는데, 언젠가 없어지고, 영조23년(1747)에 북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휴식처 겸 연회장소로 정자를 세우고 정자의 이름을 세검정이라 하였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군사들이 칼을 씻는다고 하면, 보통 거사가 끝나고 칼을 씻는것이 일반적인데, 미리 칼을 씻었다(?)는 것은 너무 앞서 간 느낌입니다.

 

세검정은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실록의 자료인 사초(史草)를 물에 씻는 세초(洗草)를 하고 관원에게 잔치를 베풀던 곳이었습니다.(사초를 물에 씻는 것은 종이를 아끼려고 환지(還紙) 작업을 해서 종이를 재생하였는데, 한지의 원료가 닥나무였기 때문에 빨아서 써도 될 만큼 질겼다고 하며, 폐기 공문서, 과거시험 답안지등도 물에 빨아 썼습니다)


▼ 세검정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만, 조선시대 때의 모습은 더 아름다웠습니다. 개발로 인한 도로확장등으로 절반은 잘려나간 채 현재의 모습만 남았습니다.

 

▼ 洗劍亭(세검정)의 글씨는 1941년 정자옆의 제지공장에서 불이 나면서 세검정도 전부 타버렸는데, 1977년 서울시에서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고하여 복원하였으며, 이때 원래 현판의 글씨가 남아 있지 않아서 다른 한자의 글씨체로 부착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누가 언제 쓴 것인지 아무런 표시가 없습니다.

 

▼ 조선 최고의 진경산수화 화가 겸재정선이 부채에 그린 세검정도입니다. 광각렌즈로 내려다보면서 사진을 찍은 것처럼 시원하게 보입니다. 영조가 사랑한 관리 겸 화가였던 겸재 정선은 수많은 그림을 남겼는데 선면화 중에 세검정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홍제천(모래내, 사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보는 듯합니다. 

 

▼ 겸재정선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세검정도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겸제 정선이 73세 때이며, 영조 24년(1748년)으로서 세검정을 다시 짓고 그 결과를 그려서 영조에게 올렸다고 알려진 그림입니다.

 

▼ [자료] 김홍도의 세검정도라고 알려진 그림인데, 조선시대의 세검정의 자리는 지금 보다는 꽤 넓었던 모양입니다.

 

▼ [자료:국립중앙박물관] 혜산 유숙(蕙山 劉淑,1824-1873,49세졸)이 그림 세검정도인데, 과장되게 그려서 그림 이름만 아니면 세검정 부근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숙은 조선말기(1827(순조 27)~1873(고종 10))의 도화서 화원으로 세검정도 및 흥선대원군의 초상화를 남겼으며, 조선 말기에 화가인 장승업의 스승이었다고 합니다.

 

▼ [자료:공유마당] 세검정도(이도영,1884-1933, 1925)에서 보면, 스님이 다리를 건너는데 맞은편 산골에는 진달래가 피어 있는 것을 보아 그림을 그린 때는 아마도 봄이었나 봅니다. 

 

▼ 세검정 앞을 흐르는 냇물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옥천(玉川)이라고도 하였는데, 세검정 위쪽 300미터 즈음에 있었다는 조지서(造紙署) 마을입니다. 종이는 한지였는데, 물이 많이 필요하였으므로 옥천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제강점기(1920년대로 추정) 때에 높은 곳에서 찍은 흑백사진이지만, 냇물이 무척 맑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 보통 조선의 정자들은 대부분 냇가에서 좀 떨어져서 있는데, 세검정은 기가 막히게 크고 좋은 바위가 냇가로 돌출되어 있어서 정자에 앉으면 곧바로 냇물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입니다.

 

▼ 1890년대나 1900년대 초로 보이는 사진인데,  세검정 앞에 있는 아이가 입은 옷을 보니 이제 막 봄이 될 때인 듯합니다. 아이의 행색을 보니 일반가정의 아이이며, 그때는 너무도 어려운 때였으므로, 대부분의 옷차림은 저랬습니다.

 

▼ 1907-1908년 독일인 장교, 헤르만산더가 일본인 사진사를 고용하여 조선을 여행할 때 찍은 세검정 사진입니다.

 

▼ 일제강점기 때의 사진을 여러 장 보겠습니다.

 

 

▼ 경치가 좋아서 조선시대에는 여러 선비들이 들렸던 아름다운 세검정 앞 냇가인데, 물이 적어서 아쉽기는 합니다.

 

▼ [자료:서울시] 1945년 화재, 30년 후인 1976년에 세검정을 복원하면서 축대를 쌓은 공사를 하는 모습이며, 세검정터를 보면 주초석 1개만 남아 있었는데, 나라살림이 빠듯하여 뒤늦게 복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기는 뭐~ 1970년대에는 문화재라는 말이 그리 흔하던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먹고살기가 정말 힘들었거든요...

 

▼ [자료:서울시] 1976년 복원공사를 1년 만에 끝내고 1977년 여름에 복원준공행사를 하였습니다

 

▼ 복원한 세검정을 자세히 보면 1900년대에 찍은 사진보다 주초석이 약 2m 정도 앞으로 암반에 바투 세워졌습니다. 아마도 도로 확장에 따라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 복원한 세검정을 보면, 그래도 조선의 정자는 아름답습니다. 정자 앞의 암반에는 아동들이 붓글씨 공부를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 일제강점기(1920년대로 추정)에 찍었던 유리건판 사진으로 세검정과 주위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세검정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안 보이지만, 세검정의 뒤에는 약간의 밭이 보일 뿐 전부 암반이었습니다.

 

오른쪽 아래에 보면 공장 같은 건물이 보이는데, 아마도 종이공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공장은 1941년 큰 불이 나서 세검정으로 옮겨 붙어, 세검정은 전부 불에 타 버렸고, 1977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지금 보다는 세검정이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 일반인들이 보기 어렵게 담을 높게 쌓았고, 냇가로 내려가는 작은 문이 두 개가 있습니다.

 

▼ 사진을 자세히 보면 1924.4.25라고 쓰여 있는데, 아마도 사진을 촬영한 날자인 듯합니다

 

▼ 홍제천의 물이 많았으면, 보기에 좋았겠습니다. 정자 앞의 널찍한 암반은 차일암(遮日巖)이라고 하였습니다

 

▼ 정자앞의 너럭바위는 차일암(遮日巖)이라고 하였습니다.

 

▼ 물이 내려오는 상류 쪽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모래, 자갈들이 꽉 차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자갈들이나 모래는 없습니다. 모래가 많아서 사천(沙川), 또는 모래내라고 하였습니다.


▼ 세검정의 앞모습입니다.

 

▼ 두 개의 안내판이 있는데, 세검정의 유래를 알려주는 안내판은 너무 반사가 심해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지역의 문화재 안내판이 반사되는 재질로 만들어진 곳이 많이 있는데, 문화재청도 이런 문화재 안내판의 문제를 알고 있겠지만, 나름대로 고충이 있을 것입니다.

 

세초의 유적 안내판은 무광의 재색바탕에 흰색글씨가 아주 잘 보입니다. 

 

▼ 세검정을 에워쌓던 담장은 없어지고, 정자 주위에는 온통 주택들만 가득하고, 오가는 차소리에 시끄럽지만, 나름대로 그 옛날 수많은 선비들과, 세초작업 후에 연회를 열었던 분위기는 느낄 수 있을 만큼은 남아 있습니다

 

▼ 내부는 화려한 단청으로 정자의 분위를 살렸습니다

 

▼ 정자는 아름다운데, 문이 잠겨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 일제강점기 때에도 암반이었던 곳은 개발로 많이 깍겼습니다

 

▼ 홍제천을 따라서 홍제천길이 만들어져 있으며 이 길을 따라서 내려가면 탕춘대성의 홍지문을 만납니다

 

▼ 무슨 글씨를 바위에 새겼는데 한문과 한글을 번갈아 길게 새겼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글씨를 봐서는 종교를 가진 사람의 포교하는 글씨처럼 보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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