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적성((丹陽赤城)은 사적 제265호이며, 충청북도 단성면 하방리(下坊里) 산3-1번지 일대의 성재산(해발 323.7m)에 위치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가 1,768척이고 안에는 큰 우물 1개소가 있다.”고 하였으며, 원래는 성산(城山), 성산성(城山城), 고성(古城) 등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따르면 주민들은 민보성(民堡城), 농성(農城)이라 불렀다. 1978년「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국보 제198호)」가 발견되고, 비문에 나오는 이름을 따라 적성(赤城)이 되었다.

 

 비문에는 신라가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지역에 진출하고 북쪽으로 세력을 팽창시킬 수 있는 요충으로 이용하였던 곳이 바로 적성임을 밝히고 있다.

 

적성은 대항하는 주방향이 북서쪽으로 판단되며 남한강 상류에서 죽령 방면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차단하는 위치에 해당하고, 더욱이 적성비의 건립 연대가 늦어도 거칠부(居柒夫)의 10군 공략이 이루어지는 진흥왕 12년(551) 이전인 점으로 보아 6세기에 신라가 제천, 영월 등 남한강 상류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하고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 편이 주로 확인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토기편도 보이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토기와 청자편도 출토되어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_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단양적성을 찾아 가는길은 단양팔경휴게소(춘천방면)의 전기차충전소 뒷쪽의 쪽문으로 나가면 됩니다. 단양적성이 있는 이 하방리 부근이 구단양이었다고 하며, 충주댐이 건설될때 지금의 단양군청 지역으로 이전을 하였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 단양팔경휴게소(춘천방면)옆의  조그만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단양적성입니다. 보통은 단양적성산성이라고 하는데 공식명칭은 단양적성입니다, 무주에도 적성산성이 있으므로 단양적성이라고 하는것이 맞습니다.

 

▼ 안내도를 보면, 단양신라적성비가 있다는 안내문이 보입니다. 성의 모양은 길다란 모양 입니다

 

▼ 성의 모양을 보면 길다랗게 생겼으며, 성문은 북문지만 보입니다. 문이 보통 동,서,남,북으로 있는데, 북문만 보이는 것 은 성곽이 너무 많이 훼손이 돼서 흔적을 찾지 못했을 수 도 있을 것 입니다

 

▼ 적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양쪽에 묘가 있는 돌계단을 올라가는데, 원래 성문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닌듯 합니다.

 

▼ 남쪽방향의 성벽이 일부 보이지만, 성문의 흔적은 안 보입니다.

 

▼ 적성의 성돌을 보면 복원 하면서 새로운 성돌을 쌓은 모습입니다. 적성이 온달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서 축성하였다는데, 성돌의 모양과 성곽윗쪽의 모습은 많이 달라 보입니다.

 

▼ 단양적성은 원래 고구려의 지역이었지만 신라에 의해서 영토전쟁으로 적성을 빼앗았는데, 신라의 진흥왕때 이 적성을 통해서 한강 상류 지역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신라에 의해서 적성이 다시 쌓았던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 신라가 한창 팽창 할 때의 지도 모습입니다. 신라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 할 때 마다 찾아가서 비를 세웠는데, 그 비가 순수비()입니다.

 

하지만 단양적성비는 진흥왕이 직접 단양에 와서 만든 비가 아니고, 비문을 단양 관리에게 내려보내 비문을 새긴 척경비(碑)입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진흥왕 척경비는 창녕척경비와, 단양적성비가 있고, 진흥왕 순수비는 1)창녕 화왕산 순수비, 2)북한산 순수비, 3)황초령 순수비, 4)마운령 순수비등 4개 입니다.(그림은 두피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돌계단으로 남쪽 성벽쪽으로 가 볼 수 있습니다.

 

▼ 단양적성은 남한강이 휘돌아 흐르는 돌출된 지형에 축조되어 강을 통한 침투의 감시가 용이한 곳 이며, 죽령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차단하는 중요한 성이었습니다.

 

▼ 단양적성 내부에는 단양적성비(丹陽 新羅赤城碑)가 있습니다. 적성비는 신라의 비로서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78년 1월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원래의 발견지점에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을 세워 관리하고 있지만 무절제한 탁본 등으로 말미암아 비면에 먹물이 묻는 등 훼손이 심한 상태 입니다.

 

비의 상단부가 파손되어 그 건립연대를 단정할 만한 연호나 간지와 같은 직접적인 근거는 없으나 내용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기존의 문헌기록과 대비하여 비의 건립연대를 545년 이전으로 보는 설, 550년으로 보는 설, 551년 이후로 보는 설 등으로 크게 엇갈려 있는 상태입니다.

 

비의 원래 모습은 알 수가 없지만 현존 비석의 높이는 93㎝, 최대너비는 107㎝로서 부정형의 모습을 하고 있고 약간 둥근형입니다.

 

▼ 이 비는 6세기 전반의 신라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먼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지역에서 이 비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로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법흥왕 7년(520)에 반포된 율령의 실상과 내용을 둘러싸고 진행되어 왔던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복속민을 신라의 지방민으로 포섭하는 하나의 방책을 확인함으로써 지방통치의 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넷째, 외위(外位)나 경위(京位) 등 신라 관등제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밖에 부(部)나 인명표기방식, 지방민의 존재양상, 서체나 문체 발달 등 여러 방면에 걸친 핵심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_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인용

 

▼ 국보 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는 고 정영호(1934~2017) 전 단국대 석좌교수가  단국대 박물관장으로 1978년 1월6일 단국대 사학과 학생들을 인솔해 속칭 '성재', '온달성'으로 불린 단성면(당시 단양면) 하방리 산성을  조사 할 때 전날 밤 내린 눈으로 덮혀 있는데 직경 한뼘정도 되는 둥근 돌을 발견했습니다.

 

이 돌에는 산에 오른 사람들이 신발에 묻은 진흙을 문질러 닦은 흔적이 있었고, 마침 정영호 교수는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려고 바위에 신발을 올리고 돌을 보는 순간 예사롭지 않아서 침을 묻혀가며 닦은 돌에는 '大(대)' 자가 보였고, 잇따라 '阿(아)', '干(간)' 자가 계속 판독되었습니다.

 

날이 어두어 다음날에 땅속에 묻힌 바위를 꺼내서 물로 씻어가며 문자를 판독해 보니 신라의 비였다고 하는데, 그 비가 지금의 단양적성비였습니다. 역사학계의 큰 경사였다고 합니다.

 

▼ 전체적으로 보아 이 비를 세운 목적은 신라가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적성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어떤 공로를 세운 중심인물인 야이차를 포상하여 그 내용을 포고(布告)하려는 데에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통하여 그러한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신라가 새로운 복속민들을 적극 회유하려는 정책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아마도 이처럼 새로운 복속민에 대해 취하였던 시책은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여 가는 데 주효하고 마침내 삼국통일전쟁에 성공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_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인용

 

▼ 서북쪽의 성벽은 접근 하기가 어렵게 많이 무너져 있습니다. 안내도에서 보는 남치성쪽은 잡목이 많아서 포기하고 북문방향으로 갑니다. 

 

▼ 남치성 부근의 정자인데, 아무 의미가 없는 그냥 쉬는 곳 입니다

 

▼ 북문지가 보입니다.

 

▼ 성곽의 두께는 대략 6미터 정도 되어 보입니다. 성곽을 보면 대부분 복원공사로 다시 쌓은 모습인데, 성곽의 높이를 보면 너무 낮게 복원 한 것 같습니다. 온달산성과 비교해 보면 비슷하기도 하고, 많이 다른것 같기도 합니다.

 

▼ 성곽의 복원은 남치성방향으로 30미터 정도 까지만 하였습니다. 온달산성을 보는 맛 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 북문지를 보는 모습입니다.

 

▼ 성의 북쪽방향으로 보는 모습이며,

 

▼ 성의 남쪽으로 보는 모습입니다. 성문이 있었는지 주춧돌이 4개 있습니다. 아마도 문루를 받치던 주춧돌인듯 합니다.

 

▼ 뭔가 아쉬운 모습입니다.

 

▼ 복원상태가 영... 성돌의 엇쌓기가 좀 잘못돼서 벌써 벌어지네요.

 

▼ 북문지에서 바라보는 남쪽방향의 성곽은 보이는 곳 까지 복원이 되었습니다.

 

▼ 물에 잠긴 구 단양지역의 모습입니다

 

▼ 단양의 명물 만천하스카이워크가 보입니다. 그 아래 강물 옆으로는 단양강잔도가 있습니다.

 

▼ 동쪽으로 가면서 둘러보는 모습입니다.

 

▼ 동쪽의 성벽도 복원공사 있었는데, 발굴조사를 통해서 복원을 했겠지만, 신라의 성이라는 느낌은 별로 입니다. 견훤산성, 온달산, 보은 삼년산성등과 너무 비교가 됩니다.

 

▼ 동쪽성벽입니다. 성벽의 형태를 보면 지면에서 어느정도 높이가 되면 경사지게 성돌을 쌓았습니다. 이러한 성곽은 처음 봅니다.

 

▼ 소나무가 인상적이었는데, 사진으로는 별로네요...

 

▼ 남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위는 사람이나, 말이 다니기 좋게 흙으로 덮혀 있습니다

 

▼ 무너진 성곽과 다시 복원한 성곽이 같이 보여 집니다.

 

▼ 동쪽성곽의 무너진 성돌을 보면 크기가 작아서 성곽내부에 채웠던 성돌인듯이 보입니다

 

▼ 성곽밖에서 보는 모습입니다

 

▼ 원래 무너진 성돌을 재사용하여 복원한듯이 보입니다

 

▼ 무너진 성벽아래에도 봄은 여지없이 찾아옵니다.

 

▼ 동쪽성벽아래에서 보는 모습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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