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선(進善)이란 임금께 바른말을 올린다는 뜻입니다. 임금이 계시는 정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므로 올바른 정치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영조 때엔 이곳에 신문고(커다란 북)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백성이 신문고를 두드려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일반 백성들이 경비가 삼엄한 궁궐의 문을 들어 올 수 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인용하였습니다.(이하 동일)

 

 

▼ 진선문에 들어서면 정면에는 숙장문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인정문이 보이는데, 임금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또 한번 꺽어져야 하는구조입니다, 경복궁처럼 전각을 일직선상에 배치하지 않은것은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것 같습니다.

 

▼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의 전각과 문의 이름들을 추가하여 보았습니다.

▼ 정청에서 비스듬히 숙장문방향으로 담아 보았습니다. 창덕궁의 인정문앞의 공터를 보면 바른 형태의 직사각형이 아니고 진선문쪽 보다 숙장문쪽이 좀 작은 찌그러진 직사각형인데, 아마도 지리적인 특성에 맞춰서 전각들을 배치하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 인정문 앞의 행각에는 정무를 보던 청사라는 의미의 정청(政廳)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정청은 관리들의 실적들을 평가하고 그에 따른 인사처리를 하거나, 역대임금의 어진,선적,어필,교명들을 보관,관리하였으며 지금의 총무처와 같은 업무를 보았으며, 규장각이 상급부서 였습니다

 

인정문은 국왕의 즉위식이 거행된 장소로 그 의미가 큰 곳입니다. 왕세자는 선왕이 별세한 궁궐의 빈전(殯殿: 왕의 빈소)에서 옥새를 받고 그 궁궐의 정전이나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따라서 앞 임금이 창덕궁에서 별세할 경우 다음 임금은 인정전이나 인정문에서 즉위하는데, 특히 즉위식은 인정전보다는 주로 인정문에서 치러졌다고 합니다.

 

진선문에서 인정문을 지나 마당을 따라 마주 보이는 문이고. 1475(성종 6)년 문 이름을 지었습니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 남쪽 행각에 내병조(內兵曹), 호위청(扈衛廳), 상서원(尙瑞院) 등이 있어서 이 인정문 뜰과 조정 마당에서 공식적인 궁중 의식이 많이 치러졌다고 합니다.‘숙(肅)’은 ‘엄숙하다’, ‘장(章)’은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입니다.

 

▼ 인정문의 남쪽의 행각에 호위청이라는 현판이 보이는데,인조반정(1623년)때 만들어진 임금을 호위하는 조직이었는데, 군사반란을 일으킨 조직들이 왕권을 견제하기 위함도 있었다고 하며, 정조때에 이르러 조직이 축소되고, 1894년 갑오개혁때 폐지되었습니다.

 

▼ 인정문의 남쪽 행각에 호위청과 나란히 붙어 있는 상서원입니다. 상서로운 기물을 관리하는 곳 으로서, 새보(: 의 도장을 말하는데 으로 만든 것을 , 금으로 만든 것을 라 함), 부패(: , 등을 말함), 절월(: [, , 使]에게 국왕이 내리는 신표() 및 도끼(또는 도끼 모양의 )를 의미함)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고 갑오개혁때 없어졌다고 합니다.

 

▼ 인정은 ‘어진 정치’라는 뜻입니다. 어진 정치를 베풀기 위해 임금은 스스로 인격을 도야하고 완성해야 합니다. 인정이라는 현판 앞에 서면 임금은 백성들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얼마나 어진 정치를 펼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이 문과 문 안의 전각에 모두 인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왕실이 존재하는 의미를 나타낸, 대표적인 장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나라의 주요 행사 대부분이 여기 인정전에서 치러졌습니다. 왕의 즉위식, 세자책봉, 왕족의 혼례, 대왕대비의 회갑 같은 경사스러운 일뿐 아니라, 신하들의 새해 인사와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적인 행사도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인정전 서쪽행각 끝에는 향실이 있습니다. 향실은 신원전의 부속건물로 제례에 필요한 향과 축문등을 보관 하였습니다. 향실 아랫쪽에 있는 행각은 예문관으로 문은 궐내각사쪽에 있습니다.

 

▼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 곳을 이용했고.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정했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습니다.

 

인정전은 1405(태종 5)년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습니다. 1428(태종 18)년에 인정전이 좁다고 해서 다시 짓게 하였으며, 그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9(광해군 원)년에 중건했습니다. 1803(순조 3)년에 화재로 불에 타서 이듬해인 1804(순조 4)년에 재건하였고, 1857(철종 8)년에는 낡아서 다시 고쳐 지었습니다.

 

▼ 진선문에서 들어서면 맞은편에 보이는 숙장문으로 일제때 훼손되었다가 1999년 복원되었습니다. 숙장문을 지나면 선정전과 희정당, 낙선재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 인정전에서 동쪽회랑을 보면 행각 중간에 선정문으로 가는 문이 하나 있는데, 광범문이며 이 문은 임금이 거처하는 편전이나, 선정전에서 인정전으로 출입 할 때 쓰던 문이며, 규범을 빛낸다라는 뜻이랍니다. 서쪽에는 숭범문이 있습니다

 

▼ 조선시대 2품이상 대신들과 정3품 이상 당상관들이 회의를 하던 즉 지금의 국무회의를 하던 빈청(賓廳)입니다만, 어찌 된 일인지, 카페가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일제때는 순종의 차고로 쓰이다가, 이명박 정부때는 카페로 허가를 내줍니다. 이승만 정부 때 부터 문화재의 관심이 한톨도 없던 독재정권 시절이 이어지면서 문화재가 소외되었다가 이제는 정신 차려서 문화재를 복원한다는데, 아직도 문화재청은 저렇게 놔두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고 하는데 낮이 간지럽습니다.

 

▼ 빈청앞에서 바라보는 선정문과 선정전입니다. 특이하게 선정전 지붕에만 청기와여서 참 화려하게 보입니다.

 

▼ 선정문은 창덕궁의 편전이었던 선정전의 정문입니다. 선정(宣政)’은 정치와 가르침[政敎]을 널리 떨친다[宣揚]는 뜻이 있습니다.

▼ 이곳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선정전입니다.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 는 뜻으로 이곳에서 임금은 신하와 국사를 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사신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조선 초에는 왕비가 이곳에서 경로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잠업을 권장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선정전은 창덕궁에 남은 유일한 청기와 건물입니다. 청기와는 아라비아의 푸른 안료와, 중국의 기술을 이용한 비싼 건축 재료였습니다.

 

연산군은 이곳과 인정전을 청기와로 덮으려 했지만, 이듬해 왕위에서 쫓겨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광해군 역시 청기와 때문에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으니 검소함을 미덕으로 생각한 조선답습니다.

 

▼ 이곳은 임금의 집무 공간이자, 임금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희정당입니다. 임금은 이곳에서 자유롭게 신하를 접견하고 학문을 논했습니다. 희정당은 화재로 네 번이나 소실되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20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전각 곳곳에서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장식을 볼 수 있습니다. 동궐도에 따르면 오래 전 희정당 마당에는 하월지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남쪽에 제정각을 세워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선기옥형을 두었습니다.

 

임금의 집무실 바로 앞에 천체 관측 기구를 두었다는 것은 하늘의 도를 본받아 바른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인조와 숙종은 희정당에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였고 정조는 여기서 성균관 시험 합격자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 희정당의 건물은 전체적으로 화려하게 보이는데, 원래는 왕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편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답니다. 원래 연산군2년(1496년)에 원래는 숭문당(崇文堂)이었으나, 연산군2년(1496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하면서 희정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 지금의 건물은 1920년에 경복궁의 강녕전 건물을 헐어 지은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용도에 따라서 내부 구조가 많이 변해서 서구화 되었습니다.

 

이 문은 다른 문과는 규모가 좀 큰데, 여기서 순종이 차를 타고 내리게끔 누각이 넓고, 높으며, 바닥에는 차가 드나들기 좋게 턱이 없이 곡선으로 돌을 깔았습니다.

 

▼ 희정당과 성정각 사이의 작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 희정당에서 보면 동인문(同仁門)이 보이는데, 세자가 거처하던 관물헌(觀物軒)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차별없이 어질게 베풀다 라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 희정당이 과거 경복궁의 강녕전를 헐어다가 지은 건물이라서 그런지 팔작지붕의 삼각형안에 글자처럼 보이는 문양이 있는데. 강(康;편안항 강)자입니다.

 

▼ 대조전쪽에서 들여다 보는 희정당 내부의 모습은 서구식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 앞에 보이는 건물은 홍복헌이며, 여춘문(麗春門)을 들어서면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 선평문은 대조전의 남쪽에 있는 문으로 정문이라 하겠습니다.

▼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은 임진왜란, 인조반정, 기타 화재등으로 불타없어졌다가 1919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와서 새롭게 건축한것입니다.용마루가 없는 것 을 보면 왕후의 침전이라는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 대조전뒤에는 경훈각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대조전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2층의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로 불타없어졌으며, 경복궁의 만경전을 헐어와 재건 하면서 경훈각이라고 하였답니다.

 

▼ 대조전뒤의 화계와 굴뚝도 다른 궁궐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화려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굴뚝에는 용,봉,황,정등 글자와 화조,토끼,괴석등을 중궁전 답게 아름답게 꾸며 놓았습니다

 

▼ 청향각은 대조전과 연결된 건물이지만, 별도의 건물처럼 청향각(淸香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옆에는 아름다운 굴뚝도 볼만합니다. 옛날에는 궁에서는 숯으로 방을 데웠다고 합니다.

 

▼ 천장문이라고 하며, 문을 열고 나가면 가정당과 후원으로 이어지는데, 개방되지 않고 있습니다.

 

▼ 구중궁궐 돌고돌아 그만그만한 건물들을 하나하나 담아보고 이제 희정당을 통해서 밖으로 나갑니다.

 

▼ 대조전과 희정당을 나와서 성정각 앞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이제 성적각으로 들어가 보는데, 세자가 거주하고 공부하던 방이 동쪽에 있어서 동궁이라고 하던 성정각에 대해서 한번 사진을 보고 알아보겠습니다.

 

 ▼ 성적각옆에 중희당터라고 있는데, 지금의 함양문의 앞자리이고 매표소가 있어서, 후원이나, 창경궁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 성정각으로 들어가는 문은 영현문(迎賢門)으로 현자를 맞이한다는 뜻의 이름처럼 왕세자의 공부방에 어울리는 문의 이름입니다.

 

▼ 성정각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루(樓)는 2개의 현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향으로 걸어둔 현판에는 보춘정(報春亭),동쪽으로 걸어둔 현판은 희우루(喜雨樓)라고 하는데, 비가 내려서 기쁘다라고 하는 까닭은 정조1년(1777년)에 가뭄이 심했는데, 건물이 완공되어 임금이 행차 할 때 비가 내려서 이름 기념하기 위해서 희우루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 성정각은 왕세자의 공부방이었는데, 일제 강점기때 내의원으로 사용했던 곳 입니다. 내의원이 원래는 인정전 서쪽에 약방자리에 있었으나, 순종때 일제에 의해 내의원이 성정각으로 옯겨져 오늘날 까지 있는것 이라고 합니다. 성정각에는 2개의 현판이 보이는데, 하나는 조화어약(調和御藥;임금의 약을 짓는다), 또 다른 하나는 보호성궁(保護聖躬;임금의 몸을 보호한다)입니다.

 

▼  희우루(喜雨樓)라고 하는데, 비가 내려서 기쁘다라고 하는 까닭은 정조1년(1777년), 가뭄이 심했는데, 건물이 완공되어 임금이 행차 할 때 비가 내려서 이름 기년하기 위해서 희우루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관물헌(觀物軒;세자의 거처)건물입니다. 집희((緝熙)는 고종의 어필이며, 계속하여 빛난다라는 뜻이랍니다.

 

▼ 승화루앞인데.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아서 그냥 겹벚꽃의 윗쪽만 담았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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