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입니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 공간도 비좁아졌습니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며 경복궁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어서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고도 합니다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 홍화문과 명정문 일원에 대한 배치도입니다

 

▼ 홍화문은 다른궁과 달리 정문이 동쪽으로 지어졌습니다.영조26년(1750년)에 균역법을 실시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고,정조19년(1795년)에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때 이곳에서 가난한 백성들에 직접 쌀을 나누어 주기도 했던 문입니다

 

▼ 안쪽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홍화문입니다.

 

▼ 홍화문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선인문이 있는데, 주로 궐내각사에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인문은 비극적인 역사를 지켜보던 역사의 한축에 있습니다. 연산군이 유배를 떠날때 나간 문이었고, 사도세자가 문 안쪽의 동궁에서 뒤주에 갖혀 죽었으며, 사약을 받고 죽었던 장희빈도 이 선인문으로 나갔습니다.

 

▼ 명정문이 바라보이는 옥천교앞입니다. 궁궐마다 이러한 다리가 만들어져 있는데, 경복궁은 영제교, 창덕궁은 금천교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 옥천교를 건너기전에 난간의 엄지기둥에는 서수(瑞獸)라는 동물상이 양쪽에 세워져 있습니다. 물론 사악한 기운이 궁궐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마음에서 만들었습니다

 

▼ 옥천교 주위에는 아름다운 봄의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습니다.

 

▼ 춘당지의 물이 흐르는 옥천교를 가운데에서 바라보니 작은 홍예 두개로 만들어진 아담한 다리 입니다.

 

▼ 관광객들도 보이고 아름다운 궁궐의 봄꽃을 카메라에 담아 두려는 사람들이 홍화문 주변에 많이 보입니다

 

▼ 정면에서 바라보는 명정문인데 크기가 아담하게 보입니다

 

▼ 명정문에서 바라보는 홍화문입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 명정문을 거치면 명정전에 이르는길은 삼도(三道)라고 하는데, 가운데 길은 좌,우의 길보다 약간 높게 되어 있고 왕이 걷는 길이며 좌측은 무신, 우측은 문신들이 걷는 길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법전으로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 탄 것을 광해군 때에 재건하여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으뜸 전각입니다. 명정전에서는 가끔 과거시험이 열리기도 하고, 중종 대에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도 열었습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에게는 왕실의 웃어른들이 많았는데, 세조 비인 할머니 정희왕후,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어머니 소혜왕후 등 궁궐의 어르신들을 모시기 위해 생신잔치, 경로잔치 등 각종 잔치를 명정전에서 자주 열었습니다.

▼ 명정문 안쪽에는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학생들의 모습입니다.

 

▼ 명전전의 남쪽 행각에 있는 광정문(光政門)으로 정치를 빛내는 문으로 해석이 되는데, 명전전 남측 행각에서 관천대 방향으로 나가는 문입니다.

 

▼ 문정전의 남쪽 행각에 있는 문이며, 문의 이름이 걸려있지는 않았습니다. 휘령전(문정전) 앞 마당에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선인문 안쪽으로 옮겨질때 저문을 통해서 나왔을 것 입니다.

 

▼ 문정전 앞에 길게 쌓여진 담장입니다

 

▼ 문정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는데, 명정전과 달리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창경궁에 오셨을 때 신하들과 정치를 의논하고 업무를 보던 편전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것 이지만 국상이 있을 때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현재 명정전과 문정전 사이에는 천랑이 있고, 과거 문정전 남쪽 방향에도 천랑이 있어 비를 맞지 않고 왕래가 가능했습니다. 문정전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후에 영조는 자신의 지나침을 뉘우치고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려 다시 세자로 복위시킵니다.

 

▼ 1688년이면 숙종14년때에 설치했던 천체관측시설인데, 조선시대때인데도 천문학이 발달했었다는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 문정전 앞의 천관대 일원에는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어서 궁궐구경이 힘들때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 입니다.

 

▼ 다시 명전전앞에 왔습니다. 창덕궁의 정전(正殿)은 명전전이며, 정전앞에 넓은 마당을 조정((朝廷)이라고 하는데, 보통 궁궐의  신하들을 지칭 할 때 조정대신들이라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오른 성종은 내명부의 어르신들이 많아서 여기서 자주 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 창경궁의 법전인 명전전앞에는 다른 궁과 마찬가지로 품계석이 세워져 있는데, 새해 정초에 임금과 신하가 새해인사를 하거나 할때 동반(東班;문관)은 동쪽이며, 서반(西班:무관과 종친)은 서쪽에 정렬합니다

 

▼ 월대가 상월대와 하월대 로 나뉘어져 있고, 명정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중앙에는 답도가 있습니다. 답도는 월대를 오르는 계단 가운데에 있는 봉황이 새겨진 사각형 돌을 지칭하는데. 봉황은 수컷인 ‘봉’과 암컷인 ‘황’을 함께 이르는 말로, 봉황이 나타나는 때는 태평성대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런 이상적인 정치를 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새겨 넣은 것입니다.

 

▼ 답도옆에는 좌/우로 돌계단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오른쪽 계단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왼쪽 계단은 그냥 돌계단입니다. 아마도 왕이 올라가는 계단에만 문양을 새겨 넣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 궁에는 보통 네 귀퉁이 처마 밑에 물그릇을 놓아 두는데, 불의 기운을 물로 누르려는 염원과 불이 났을때 초기 진화에 쓸려고 물을 놓아 두었던 물그릇인 "드므"입니다. 드므는 순수 우리말로 입이 넓은 큰그릇이랍니다.

 

▼ 창경궁의 정전(正殿)인 명정전 내부의 어좌입니다. 어좌뒤의 그림은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이고, 왕궁의 정전에서 보는 모양과 비슷한 구조 입니다.

 

▼ 명전전에서 문정전을 가기 위해서 행각을 지나가 봅니다.

 

▼ 창경궁의 편전인 문전정입니다. 문정전은 명정전과 달리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창경궁에 오셨을 때 신하들과 정치를 의논하고 업무를 보던 편전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지만 국상이 있을 때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현재 명정전과 문정전 사이에는 천랑이 있고, 과거 문정전 남쪽 방향에도 천랑이 있어 비를 맞지 않고 왕래가 가능했습니다. 문정전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후에 영조는 자신의 지나침을 뉘우치고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려 다시 세자로 복위시킵니다

▼ 문정전은 영조가 첫째 부인인 정성왕후의 위패를 모셔두고 혼전(魂殿)으로 사용하면서  휘령전(徽寧殿)이라고 하였답니다 휘령전 앞 마당에서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갖혀 죽었던 곳 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힌뒤 선인문 안쪽으로 옯겨져서 여드레만에 숨을 거두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정치가 참 비정한 것인가 봅니다.

 

▼ 문정전의 내부입니다. 명전전의 일월오봉도와 같은 모양입니다.

 

▼ 문정전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숭문당입니다.

 

▼ 지금 보이는 숭문당 현판은 원래 숭문당의 뒷쪽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즉 뒷쪽에 출입문이 있었습니다.

 

▼ 숭문당은 학문을 드높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임금과 신하들이 고전에 대한 경연을 펼쳐 지식을 쌓던 곳이고. 이곳에서 성균관 유학생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고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1742년(영조 18년) 영조가 숭문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조가 이 당을 세운 것은 대개 문을 숭상하는 뜻에서였다. 지금 내가 그대들을 이 당에서 친히 시험 보이는 것도 문을 숭상하려는 뜻이니 그대들은 이러한 뜻을 깊이 유념하라.' 그리고 숭문당 내부에는 일감재자(日監在玆)라 쓰인 현판이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를 뜻합니다.

 

▼ 문화해설사분께서 학생들에게 설명하시는 모습에서 열정 느껴집니다. 한국은 어린학생들에게 창경궁의 역사를 가르치고, 일본은 이웃나라와의 평화보다는 전쟁과 도적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경궁은 일본놈들에 의해서 파괴되고 창경원으로 격하되는 비운의 궁궐이었습니다. 일제의 철저하게 파괴된 궁이 어찌 창경궁뿐이겠습니까...

 

▼ 빈양문(賓陽門)은 정치공간인 외전과 생활공간인 내전을 구분하는 문이며. 명정전의 뒤편에 있습니다. 빈양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이 밝음은 곧 임금을 상징합니다.

 

▼ 밖에서 보는 숭문당과 붙어 있는 빈양문입니다. 답답한 문정전과 숭문당을 거쳐서 빈양문으로 나오면 내전의 넓은 터에서 보는 모습들이 마치 궁궐의 정원들을 보는 듯 합니다.

 

▼ 내전의 건물들을 보면 회랑으로 연결되지 않고 건물마다 떨어져 있습니다. 다른 궁궐에서 보는것과 달리 건물의 배치가 자유스러운것이 특징입니다.

 

▼ 함인정 옆에는 특이하게 오층 석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 함인정은 햇볕이 잘 드는 남향에, 넓은 뜰이 전면에 있어 임금이 많이 사용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임금은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을 만나고, 신하들과 중용∙심경과 같은 고전을 읽으며 경연을 자주 나눴습니다.

 

특히 영조와 정조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의 함인정은 사방이 트여있지만 19세기 초 궁궐그림인 동궐도에서는 함인정의 삼면이 막혀 있었습니다.

 

▼ 함인정의 주위에는 담장에 봄꽃이 화사하게 피어서 딱딱한 궁궐의 분위기를 어느정도 부드럽게 보여줍니다

 

▼ 함인정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담장은 창덕궁의 낙선재가 있는 곳 입니다.

 

함인정()이 있는 자리는 성종 때 건립한 인양전이 있었던 자리인데. 인양전이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을 떠났다가 창경궁으로 돌아와  인왕산 아래 있었던 인경궁에 있는 함인정을 헐어 이곳에 옮겨와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 기품이 있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게 홀로 서있는듯한 느낌이 드는 함인정입니다.

 

▼ 문정전 뒷쪽의 길에서 멀리 바라보는 함인정입니다.

- 창경궁(1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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