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족의 무덤에 대한 일반지식과 왕의 생애 및 왕족의 계보, 그 당시의 정치적인 등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여야 왕릉의 답사때 의미없는 답사가 되지않습니다.
조선왕조600여년간의 능의 조성과 관리 천장(묘의 이장)등에 지식을 짧은 시간에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지식은 알아야 겠기에 나름대로 왕릉에 대해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몇가지 정리하였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조선왕릉,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조선왕릉의 지역별 분포도입니다. 유네스코에 등록된 조선왕릉은 남한지역의 왕릉 40기만 등록되었고, 북한의 제릉(제1대 태조 첫 번째 왕비 신의고황후 제릉(齊陵),후릉제2대 정종.정안왕후 후릉(厚陵)은 제외 되었습니다
1. 조선왕릉의 종류와 내용
- 능(陵) :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
- 원(園) :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
- 묘(墓) : 나머지 왕족(대군, 군, 공주, 옹주, 후궁)과 폐왕의 무덤
2.조선왕릉 일람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 참고로 조선왕조에는 왕자나, 후궁의 무덤인 원,묘가 있는데, 왕에 관계된 원이나 묘의 현황을 추가 하여 만들어 보았습니다.
3.조선왕릉의 형식
- 단릉(單陵) : 단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능이다. 대표적으로 태조 건원릉, 단종 장릉, 중종 정릉 등 15기의 능이 있다. 단릉 형식은 태조 건원릉부터 시작하여 조선 중기까지 나타나며 18세기 이후에는 거의 볼 수 없다.
- 쌍릉(雙陵) : 쌍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곡장 안에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의 원칙에 따라 조성하였다. 대표적으로 명종 강릉, 영조 원릉, 철종 예릉 등 9기의 능이 있다. 쌍릉 형식은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
- 합장릉(合葬陵) : 합장릉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능이다. 영조 이전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2좌씩 배치하였으나, 영조 이후에는 혼유석을 1좌씩 배치하였다. 대표적으로 세종 영릉, 인조 장릉, 정조 건릉 등 8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순종황제 유릉은 황제와 황후 두 분을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동봉삼실(同封三室) 합장릉이다. 합장릉의 형식은 18세기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능역 조성시 소요되는 경비와 인력을 절감하기 위해서이다.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 동원이강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이다. 최초의 동원이강릉은 세조 광릉이며, 예종 창릉, 성종 선릉 등 7기의 능이 있다.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숙종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 동원이강릉 형식은 세조 광릉을 시작으로 15세기에만 집중되었을 뿐 이후에는 볼 수 없다.
-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 동원상하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 아래로 조성한 능으로,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조성하였다. 효종 영릉과 경종 의릉 2기가 해당되며, 왕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다.
- 삼연릉(三連陵) : 삼연릉은 한 언덕에 왕과 두 명의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헌종 경릉이 유일하다.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오른쪽(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왕을 모시고 첫 번째 왕비(효현성황후)와 두 번째 왕비(효정성황후)를 순서대로 모셨다.
4.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공간의 성격에 따라 진입공간, 제향공간, 능침공간의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공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왕릉은 죽은 자를 위한 제례공간이므로, 동선의 처리에 있어서도 이에 상응하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동선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죽은 자의 동선만을 능침영역까지 연결시켜 공간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향로·어로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동선은 공존하되 구별되어있다.
즉, 산 자는 정자각의 정전에서 제례를 모신 뒤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의 정전을 통과하여 능침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5.조선왕릉의 일반적인 배치표
6.조선왕릉을 호위하는 석물
- 문석인(文石人) : 조선시대 초 왕릉은 고려 말 현·정릉의 묘제에 영향을 받아 쌍릉인 후릉과 현릉에서 문무석인이 각각 2쌍씩 세워졌으나, 이후 왕릉 제도가 정비되면서 1쌍씩 세워지게 되었다. 문석인은 복두를 쓰고 공복을 입은 채 홀(笏)을 잡은 복두공복형(?頭公服型)이 조선 초기부터 주류를 이루었다.
정조가 사도세자[장조]의 현륭원을 세우면서 금관을 쓰고 조복을 입은 금관조복형(金冠朝服型) 문석인이 처음 등장하게 되었으며, 정조 건릉을 비롯한 이후의 왕릉에도 금관조복형 문석인이 세워지게 되었다.
<<< 태조 건원릉 문석인 >>>
- 무석인(武石人) : 우리나라에서 갑주(甲胄;갑옷과 투구)를 입고 손에 칼을 쥔 형태의 무석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공민왕릉 부터이다. 공민왕릉 무석인은 2종류로, 군례를 행하는 젊은 장수와 칼끝을 지면에 놓고 양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잡은 노장의 형태이다.
조선왕릉에서는 노장의 형태를 받아들였는데, 복발형(覆鉢形)의 투구를 쓰고 목가리개[頸甲]가 있는 형상이다. 무석인은 능침의 하계(下界)에 석마와 함께 세워졌다. 무관의 성격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문석인에 비해 다소 커진 얼굴과 밭은 목, 얼마간 굵어진 듯 한 몸 처리와 약간 길어진 상반신의 처리 그리고 중요한 골격마디의 강조 등으로 무관의 특징을 표현하였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칼을 잡고 서 있는 무석인의 형식은 전 시기에 걸쳐서 같은 세부 요소들이 교차로 나타난다. 무석인의 규모는 각 왕릉마다 차이가 있으나 허리에 칼집을 차고, 칼끝을 아래로 한 검을 양손으로 잡고 있는 양식은 모두 동일하다
<<< 태조 건원릉 무석인 >>>
- 망주석 : 망주석(望柱石)은 석망주(石望柱) · 전죽석(錢竹石) · 망두석(望頭石) · 망주석표(望柱石表)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망주석은 중국의 화표석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의 괘릉(掛陵)과 흥덕왕릉(興德王陵)에서 처음 나타나 고려왕릉 전반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능원(陵園) 뿐 아니라 사대부묘까지 세워졌다. 중국의 화표석이 묘역이나 신도의 입구에 세워져 묘역의 시작점을 알리는 기능을 하는 것과 달리, 조선왕릉의 망주석은 봉분 앞 석상 좌우에 2기가 세워져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망주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멀리서 묘역을 한눈에 알아보기 위한 표지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왕릉 망주석의 주신 상단부에는 세호(細虎)라 불리는 작은 동물 형상이 고부조로 조각된다. 세호는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나, 실제 형상은 호랑이와 닮지 않았다. 조선 초기 망주석의 세호는 마모가 심하고 다리사이에 공간이 있어 귀[耳]의 형태처럼 보이지만, 후기로 내려오면서 긴 꼬리와 갈기가 표현되는 등 장식성이 강한 형태로 조각된다. 세호가 상징하는 의미는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으며, 봉분을 기준으로 좌승우강(左陞右降)의 원칙이 지켜져 동측 망주석의 세호는 위쪽 방향으로, 서측망주석의 세호는 아래쪽 방향으로 새겨진다.
- 장명등(長明燈)은 왕릉의 묘역을 환하게 밝히는 등구(燈具)로, 조선시대 왕릉에서는 하현궁(下玄宮)한 날부터 소상(小祥)때 까지 매일 하루에 3번씩 제사를 지내며 장명등에 연등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등을 밝힌 흔적은 없다고 합니다.
- 석수
조선왕릉의 석수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 석마(石馬)로 구성된다. 석양과 석호는 곡장 안에서 봉분을 등진 채 봉분 주변에 번갈아 배치되며, 봉분을 외호하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벽사의 역할을 강조하는 배치로 해석되기도 한다. 왕릉에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는 형식은 고려시대에 완비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배치방식이나 석수의 수는 능마다 차이를 보인다.
석마는 고려시대 묘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조선시대 태종의 헌릉을 조성할 때 까지 제작되지 않다가 세종대 현덕빈묘(1441년) 조성을 계기로 이전 왕릉에도 추가배치된 것이다
- 석호의 모습은 왕릉을 지키는 동물답지 않게 친근한 모습입니다 -
7.봉분의 석물
1) 병풍석 (屛風石)
여러 가지 석재으로 이루어진 병풍석은 다른 나라의 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 특유의 능묘 조각의 구조이다. 병풍석이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이기 시작하며 그 구성은 지대석, 면석, 우석, 만석, 인석으로 되어 있는데,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실질적으로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 또한 병풍석 중앙의 면석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기고, 모서리 우석에는 영저와 영탁을 조각하며, 모란, 구름 등이 장식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는 봉분을 보호하고 상징적으로는 수호의 역할을 한다.
2)난간석(欄干石)
난간석은 병풍석 밖으로 봉분을 울타리처럼 두르거나 병풍석 없이 봉분을 두르고 있는 석물로, 왕릉의 봉분 주변에 난간석을 조성한 것은 우리나라 능제의 특징이다. 이미 통일신라의 성덕왕릉(736년)에서 그 초기 예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중국의 능에서는 보이지 않는 석물로, 건축물에 난간을 돌로 만들었던 방식을 왕릉석물에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세조 광릉 이후 병풍석이 조성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병풍석의 유무와 상관 없이 거의 모든 왕릉에는 난간석이 조성되어 물리적으로나 시각적으로 봉분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 현릉(문종릉)의 봉분에서 봉분 석물을 표시하여 보았습니다.>>>
3)소전대와 예감
소전대와 예감은 왕릉에서 제사를 마친 후 축문이나 혼백 등을 태우기 위한 시설물이다. 일반적인 실내 제사에서는 축문을 화로에 태웠으나, 왕릉과 같이 밖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 축문이나 혼백을 불사르거나 묻기 위한 시설물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소전대와 예감은 모두 의례가 끝나는 정자각 뒤편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소전대와 예감은 형태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소전대는 받침 모양으로 돌을 만들어 다듬은 형태이고, 예감은 장대석 돌을 사각형으로 둘러 만든 형태이다.
4)혼유석(魂遊石)과 고석(鼓石)
능의 정면에 상의 형태로 놓인 돌인 혼유석은 원래 명칭은 석상(石床)이다. 시신을 안장한 후 그 통로를 막고 그 위에 박석과 북 모양의 둥근 고석을 놓고, 그 위에 혼유석을 설치한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혼유석이라는 명칭이 속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한 돌이라는 의미이다
족석(고석)은 봉분 앞에 놓이는 장방형의 석상(石床)을 받치고 있는 돌로, 북의 형태를 닮았다 하여 고석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 초기에는 석상 아래 네 귀퉁이와 중앙에 모두 5개의 족석을 두어 석상을 받쳤으나, 세종 영릉부터 4개의 족석을 두었다.
대부분의 족석은 위아래에 연주문을 두르고, 중앙에 나어두문(羅魚頭文)을 새겨 장식하였다. 나어두문은 고려왕릉의 족석에서 그대로 이어온 것으로, 의미나 기원이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으며, 벽사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5)베례석
배례석은 조선왕릉에서는 초기의 1대 건원릉(建元陵)과 3대 헌릉(獻陵)에서만 보이는 특수한 석물이다. 능상 위에서 봉분에 절하기 위해 마련된 석물이며, 하계 중앙 남측에 장방형의 판석을 땅과 같은 높이로 설치하였다. 세종 때 왕릉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유교 의례를 강화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8.조선왕릉의 건축물
1)홍살문(紅箭門)
홍살문은 능역의 가장 아래쪽 정자각 남측 향로·어로가 시작되는 곳에 신성구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문이다. 중앙에는 삼지창과 태극문 등을 새긴 형태와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지붕은 달지 않는다. . 홍살문의 형태에는 홍살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가 높아지는 ‘산(山)’자형과 같은 높이를 유지하는 ‘일(一)’자형이 있다. 홍살 사이의 간격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정자각의 규모가 커지면서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시각적인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 붉은 창살이라는 이름처럼 홍살문은 좌우 기둥과 인방, 살 등을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한다. 이 문을 들어서면 신성한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2)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산릉의례를 위한 건물로, 정전(正殿)과, 배위청(拜位廳)이 결합한 丁자형 평면을 이루어 정자각(丁字閣)이라 부른다.
정전은 대부분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면 3칸은 모두 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 측면은 화방벽이 설치되어 있는 벽으로 되어 있다. 배면의 어칸은 신문(神門)이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의 협칸은 벽으로 되어 있다.
배위청(拜位廳)은 정면 1칸에 측면 2칸으로 6개의 나무 기둥만이 세워지고 사방이 개방되어 있어서 제사를 지낼 때 움직임을 편하게 한다.
월대와 기단은 화강석 장대석을 쌓아 구성했으며 계단은 월대의 양 측면에 설치되어 있다.
- 정자각의 지붕에 있는 잡상은 주술적인 의미의 장식물입니다
- 동계와 서계
동쪽 계단은 두 곳으로 나뉘며, 두 계단 중에 하나는 향로계(香路階, 운계)로 측면에 구름문양을 새긴 장식이 있는데, 향로라고 부르는 향을 모시고 가는 길과 이어진다. 임금조차도 이 계단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그 옆 간소하게 꾸며진 어로계(御路階, 동계)를 이용한다. 서쪽 계단은 제사가 있을 때 수라간에서 준비한 음식물을 나르는데 이용되거나 제사가 끝난 후 축문을 태우기 위해 예감으로 축문을 들고 갈 때 사용한다.
- 신도는 정작각에서 능침으로 연결된 돌다리인데, 혼이 다니는 길이라는 의미 입니다.
3) 비각(碑閣)
- 비각은 표석이나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조선왕릉에서는 정자각의 우측[동쪽]에 위치한다. 비각은 대체로 정면1칸, 측면 1칸의간소한 규모로 구성되며, 이 밖에 합장릉(合葬陵), 쌍릉(雙陵), 추봉, 신도비 건립 등으로 비석이 2기 이상으로 늘어날 경우 2칸 이상의 비각이 건립되기도 했다.
비각은 벽의 하부는 전돌로 채워 내구성을 높였지만 상부는 나무로 창살만을 내어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한 구조이다. 정면에는 판살문[板箭門]을 두어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고, 양측면과 후면에는 살창[箭窓]을 두었다.
- 비각 안에는 신도비(神道碑)나, 표석(表石)이 세워져 있습니다
4)수라간(水喇間)
수라간은 왕릉에 제례가 있을 때 제수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규모는 18세기까지 2칸 또는 3칸으로 통일되지 않았으나, 고종연간에 3칸으로 정형화되었다. 수라간은 정자각의 서남쪽에 위치해, 동남쪽의 수복방과 대칭해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조선왕릉의 수라간 가운데 왕릉 건립 당시에 있던 건물이 그대로 전하는 예는 없으며, 80년대까지 주춧돌 터만 남아있던 것을 원형 복원한 것이 대부분이다.
5)수복방(守僕房)
수복방은 능 주변을 관리하는 수복이 거주하는 건물이다. 규모는 18세기까지 2칸 또는 3칸으로 통일되지 않았으나, 고종연간에 3칸으로 정형화되었다.
수복방은 정자각의 동남쪽에서 수라간과 대칭해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1789년(정조 13) 조성한 사도세자[장조] 현륭원의 경우 봉분의 축이 서쪽으로 치우쳐 수복방의 위치가 능상의 남쪽 조망을 가로막을 우려가 제기되어, 정조가 수복방을 수라간과 같은 서편에 나란히 세우도록 지시한 대목이 있다.
정조의 건릉 역시 현륭원의 제도를 전례로 삼아 정자각 서편 앞쪽에 수라간과 수복방을 나란히 위치시켰다. 현재 조선왕릉의 수복방 가운데 왕릉 건립 당시에 있던 건물이 그대로 전하는 예는 없으며, 80년대까지 주춧돌 터만 남아있던 것을 원형 복원한 것이 대부분이다
6)재실(齋室)
재실은 왕릉의 수호관리를 담당하던 참봉(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사에 쓸 향을 보관하고 제기(祭器)를 간수하며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제례를 위한 의식을 준비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제례가 시작되는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재실의 가장 중심 건물은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이며 그 옆에 제관이 머무는 재실이 있고 제수 장만 등을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등이 있다. 각각의 건물은 별도의 행랑이나 울타리로 둘러싸여 공간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재실은 원칙적으로 봉분이나 정자각이 있는 능 중심부에서 2, 3백 미터 이상 떨어진 동남쪽에 놓인다. 제사가 있을 때 왕이나 제관은 일단 재실에 들어가 잠시 머물면서 옷을 갈아입고 제사에 나서게 된다. 건물의 구조는 팔작지붕에 민도리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의 칸수는 능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