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은 정조13년(1789년)수원 신읍치 건설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한 행궁으로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 되다가 정조 18년(1794년)과 정조20년(1796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축성 기간에 화성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 되었으며, 자세한 행궁의 이모저모는 홈페이지 수원시 화성문화재단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되겠습니다.

 

※ 여기에 쓰인 설명자료는 (주)화성문화재산 홈피에서 인용하였습니다(문제될시 삭제함)

 

여민각 타종식 하루전 및 화성문화재 개막일 전날 다시 한번 시간을 내서 찾아보았으며, 사진위주로 내용을 정리하였고, 특히 일반인들이 화성행궁 안에서만 뱅뱅돌다가 행궁관람을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반드시 화령전에 들려서 영조대왕의 어진을 보고 갔으면 합니다.

 

 

▼ 화성행궁을 찾으면 맨처음 아름다운 신풍루를 만날수 있습니다.

   

신풍루(新豊樓)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년(정조 14년)에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가,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습니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입니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 아래그림은 1920년대 일제시대때의 신풍루의 모습이며,(자료출처는 화성연구회 홈페이지),  이후 일제에 의해 행궁은 낙남헌을 제외한 전체의 건물들이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하여 무차별 훼손되었습니

 

 

▼ 화성행궁의 간단한 전도(全圖)이며 미복원된 건물도 2개가 보입니 .

 

▼ 3년전 아름다운 신풍루와 신풍루 앞마당의 여러모습이며,  홍살문은 신풍교를 복원하면서 신풍교 앞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 말에서 내리시오!(3년전 모습),  이 하마비 역시 신풍교를 복원하면서 신풍교옆으로 이전되었습니다.

 

▼ 화성행궁은 대장금의 주된 촬영장소였다는것을 아시분은 많지는 않을것입니다. 

 

▼ 신풍루를 행궁안쪽(좌익문)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 다음은 화성행궁의 건물의 모습으로서 먼저 좌익문입니다.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입니다. 1790년 완성되었고,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으며,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습니다.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며,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던 문입니다.  

 

봉수당(奉壽堂)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현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하며, 1795년(정조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습니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고 합니다이 봉수당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습니다.  

 

▼ 아는것 만큼 재미가 있습니다.   문화해설사분이 해박한 지식으로 어르신네들한테 화성과 행궁의 모든것에 대해서 알려드리고 있습니

 

유여택(維與宅) 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으며,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습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합니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습니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고, 1795년(정조19)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경룡관(景龍館) 은 1794년(정조 18)에 세워진 2층 구조로 건물로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입니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다고 합니다.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을것입니다.

 

장락당(長樂堂)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습니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으며,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고 합니다.

 

실제로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에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복내당(復內堂)은 "복은 안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라는 뜻이며,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화성행궁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고,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고 합니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다가, 1794년(정조 13)에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세워졌습니다.

 

북군영(北軍營),남군영(南軍營)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며,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 하였다고 합니다.  

 

낙남헌(洛軒)은 1794년(정조18)에 완공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에도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입니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왔으며, 1795년(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습니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집사청(執事廳)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며, 죄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세워졌고,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저 있습니.

 

집사청앞 느티나무인데, 참 오랫동안 버티어 주었습니다.

 

노래당(老來堂)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도 사용하였습니다.

 

노래()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 화령전은 순조 1년 4월 29일에 완성되었습니다. 화령전이 수원에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정조가 얼마나 수원을 사랑하고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며, 정조가 돌아가신 이후 정조의 신위는 종묘에 안장되었고수원 화성에는 영전을 만들었습니다.

 

화령전을 완성하고 5월 2일에 정조대왕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크고 작은 영정 2본을 봉안하여 큰 것은 펴서 보관하고, 작은 것은 궤짝에 봉안하였습니다.

 

화령전의 이름은 화성에서 '화'자를 따고, 「시경」국풍 주남 <갈담(葛覃)>의 마지막 구절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에 서 '령'자를 따서 붙인 것으로. 곧, 화령전은 국왕 순조가 화성에 묻힌 선왕 정조를 찾아가 문안을 여쭙는 공간이었던 것입니.


화령전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운한각"의 현판은 원래 순조의 글씨였으나, 남아있지 않고 1975년 박정희대통령의 글씨가 걸려있습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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