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장대(守禦將臺)는 인조 2년~4년(1624~1626)에 축성된 남한산성의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입니다. 남한산성의 5개 장대중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남한산성 안의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합니다.
처음에는 단층으로서 서장대(西將臺)라고 하였으나, 영조 27년(1751년)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밖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안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헌종2년(1836년)에는 유수 박기수(1792~1847)가 수어장대를 중건하면서 그의 형, 의금부도사 박주수(朴周壽;1787~1836)가 수어장대 글씨를 다시 썼습니다.
무망루는 편액은 1989년 밖으로 이전하여 현재 수어장대 오른쪽에 있습니다.
※ 자료사진은 문화재청,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경기문화재연구원 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로 들어가려면 청량당의 협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합니다. 협문은 동쪽, 남쪽에 있습니다.
▼ 청량당의 협문으로 들어갑니다.
▼ 청량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 있으며, 우측으로는 수어장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 이 사진은 1960년대에 청량당 안에서 도당굿(남한산성매당왕신도당굿(南漢山城鷹堂王神都堂굿)을 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것이며, 이회와 그의 처와 첩실의 넋을 달래고자 거행되는 굿으로 남한산성의 역사와 무교를 바탕으로 한 마을 사람들의 무탈함을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 도당(都堂)이란 당을 높여서 부르는 말로 으뜸이 되는 곳을 상징하기 때문에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관장하는 으뜸의 신당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곳에서 행하는 굿을 '도당굿'이라고 합니다. 자료사진은 경기도의 도당굿을 하는 모습입니다.
보통 굿을 미신이라고 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는 일제강점기부터 민족문화의 씨를 말리고 마을 단위로 주민들이 뭉치는 것을 못하게 하려는 술책과 일부 종교단체에서 도당굿이 오랫동안 이어져 온 마을의 문화라는 인식이 모자라서 나쁘게 보기 때문이며, 굿은 종교와 관계없이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입니다.
▼ 청량당은 이회장군이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에 동남쪽의 축성 공사를 맡았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모략을 받고 수어장대 앞에서 사형을 당하고, 그의 처와 첩도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강에 투신자살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회장군의 죄가 없음이 밝혀져서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의 넋을 달래게 되었는데 그 사당이 청량당입니다.
인조는 장수를 죽이는데도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인간이었나 봅니다. 너무나 무능하고 똥고집만 부리던 조선 최악의 군주였습니다. 이회장군을 처형할 때의 남한산성 수어사는 숭렬전에 배향되어 있는 이서(李曙) 장군(1580~1637)입니다만, 이서장군은 상관으로서 인조에게 아무런 반론도 안 한 것이지, 아니면 그 또한 무능한 수어사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역사에 인조만 나오면 열(♨)이 받고, 무엇이든지 좋게 봐줄 수가 없는 일개 능양군일 뿐입니다.
▼ 청량당 앞마당은 마치 수어장대의 옆 마당처럼 보입니다.
▼ 사당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 있습니다. 뒤쪽이 사당입니다.
▼ [자료:송풍수월] 청량당 내부의 그림을 자료사진으로 보겠습니다. 가운데가 이회장군 영정(가상)입니다. 도당굿에 쓰이는 영정이라서 좀 이상하게 보일 수 도 있습니다.
▼ [자료: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청량당의 좌측으로 보는 순서에 따라서 그림을 배열하였습니다.
▼ [자료: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우측으로 보는 순서에 따라서 그림을 배열하였습니다.
▼ 수어장대 좌측의 멋진 소나무입니다. 수령(樹齡)이 얼마인지 알 수 없습니다
▼ 웅장하게 보이는 수어장대입니다.
▼ 안내문에 보면 병자호란 때 수어장대(서장대)에서 지휘는 이천부사가 하였다고 하고, 뒤에 설명에는 광주부윤인 수어사가 수어장대에서 지휘를 하였다고 합니다. 병자호란 때는 이천부사가 수어사가 되어 서장대(수어장대)에서 지휘를 하였다는 설명이 있는데 아마도 수어장대에 진을 친 우영군을 이천부사가 지휘하였을 것입니다
▼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장대가 있었습니다. 동,서,남,북,외동에 각각 하나씩 있었으나, 서장대(수어장대)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터만 남아 있습니다.(장대가 4개라는 자료가 대부분인데 실제 장대는 5개가 있었습니다)
- 남한산성의 장대는 동장대, 외동장대, 서장대(수어장대), 남장대, 북장대등 5개의 장대가 있었습니다.
▼ 참 멋지고 웅장한 수어장대입니다. 자료를 보면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왕(영조, 정조)들은 남한산성에 들러서 그날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다짐을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화성의 서장대와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와 비교해보면 크기와 웅장함에 있어서는 수어장대가 월등하게 커 보이지만, 장수대로서의 위엄성만큼은 어느 것이 못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수어장대의 좌측과 우측면을 보는 모습입니다.
▼ 겹처마 사래 끝에는 빗물 방지용 토수(吐首)를 끼웠습니다. 우리가 보통 팔에 끼우는 것을 토시라고 하는데 토수의 방언입니다.
▼ 경기도의 홈페이지에서 수어장대 주변의 항공사진을 몇 장 가져와서 보겠습니다(2000년 전, 후로 보입니다)
- 아래의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인용한 일제강점기 때의 유리건판 사진입니다
▼ 1920년대로 추정되는 사진으로 수어장대에서 보는 산성마을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산성마을의 인구수가 꽤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행궁은 멀쩡하게 보입니다.
▼ 수어장대의 하늘 위에서 보는 2000년대 현재의 모습입니다
▼ 수어장대에서 보는 서쪽 방향이며, 성곽으로 이어진 중간에 서문(우익문)이 보입니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서 사방을 볼 수 없었지만, 조선시대에는 나무가 별로 없어서 수어장대에서 사방을 훤히 볼 수 있었습니다.
▼ 남문(자하문) 방향에서 바라보는 수어장대입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면 미군이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인데, 수어장대 현판의 글씨와 바탕색을 보면 시대에 따라서 서로 바뀐 모습을 보이고 현판을 걸 때 2층 누각의 문을 가리고 걸려 있습니다.
자료를 보면 수어장대가 처음에는 단층 누각으로 ‘서장대’라 하였는데 영조 27(1751)년에 광주유수 이기진이 2층의 누각으로 증축하고 수어장대라고 현판을 달았습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있어서 수어서대(守禦西臺)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헌종2년(1836년)에 유수 박기수가 수어장대를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그의 동생 의금부도사 박주수(朴周壽;1787~1836)가 수어장대 글씨를 썼다고 하므로, 원래의 현판은 버리고 새로 글씨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박주수의 수어장대 글씨는 1836년 6월 하순에 썼으며, 박주수는 수일 후 7월 5일, 49세로 세상을 떴으므로 그의 마지막 붓글씨가 되겠습니다.
▼ 1970년의 사진으로 보이는데, 2층 누각의 문에 그려진 태극문양이 단순하게 보이고, 현판을 문짝을 가리지 않고 처마에 바짝 붙여서 걸었습니다
▼ 수어장대 왼쪽에 보이는 작은 보호각이 보이는데, 무망루(無忘樓) 현판이 걸려 있는 곳입니다.
무망루(無忘樓)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겪은 시련과 인조(仁祖)의 아들인 효종(孝宗)이 볼모로 심양(瀋陽)(현 봉천(奉天))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淸國)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北伐)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그 후 영조(英祖), 정조(正祖)가 효종(孝宗)의 능소(陵所)인 여주(驪州) 영릉(寧陵)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恥辱史)를 되새겼다고 합니다.
▼ 오른쪽에 작은 보호각이 보이는데, 무망루(無忘樓)입니다. 루(樓)라는 것은 2층 다락을 말하는데, 어찌 한 칸짜리 집을 루(樓)라고 하였을까? 하는 의문은 갖고 자료를 찾아보면, 무망루(無忘樓) 현판은 영조(英祖) 27년(1751)에 서장대를 2층 누각으로 다시 지으면서 밖애는 수어장대,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1989년에 보호각을 지어서 무망루 현판을 지금의 보호각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즉 수어장대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 무망루 현판(懸板)의 보호각과 높게 자란 두 그루의 나무가 보이는데, 오른쪽 나무가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남한산성에 방문했을 때의 기념으로 심은 나무입니다
▼ 이 보호각은 1989년에 지어졌으며,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수어장대 2층 누각에 걸려 있던 무망루(無忘樓) 현판을 옮겨서 걸어 놓았습니다.
▼ 무망루(無忘樓)의 현판을 걸었던 시기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보면, 여러 자료가 보이는데, 영조(英祖) 27년(1751)에는 유수(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왕명(王命)으로 서장대(西將臺)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 편액(扁額)은 수어장대, 내부 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무망루의 이름은 영조가 지었지만, 현판의 글씨는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망루의 뜻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겪은 시련과 그의 아들인 효종(孝宗)이 볼모로 심양(瀋陽,현 봉천(奉天)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한 이후에 청국(淸國)에 대한 복수심과 북벌(北伐)을 이루지 못한 원한을 잊지 말자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영조가 붙인 이름입니다.
▼ [자료사진] 수어장대 2층의 동쪽에 걸려 있었던 무망루 현판입니다. 수어장대 2층은 드나들 수 없게 문을 잠그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내부의 무망루 현판을 1989년에 밖으로 옮겼습니다.
▼ 이 표지석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남한산성에 방문하였을 때 기념으로 나무를 심었다는 표석이며, 단기 4286(서기 1953년)년 9월 6일입니다. 그때는 무망루 현판의 보호각이 없을 때입니다.
▼ 수어장대 북쪽 끝에 보이는 바위에 새겨진 각서입니다. 글씨는 수어서대(守禦西臺)입니다. 수어장대는 수어서대라고도 하였으며, 언제 새겨진 글씨 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매바위라고도 하는데 수어장대에서 억울하게 목을 베인 이회장군과 관계가 있습니다.
▼[자료사진] 매바위 전설이 새겨진 표지석 자료 사진입니다.
▼ 이회장군이 죽자 매가 날아와서 바위에서 앉아서 쓰러진 이회장군을 바라보았다는 매바위 전설입니다
▼ 1636년(인조14)년 12월에 아무것도 없었던 송파나루를 건너서 1만여 명의 청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올 때 수어장대에서 바라보던 조선의 장수들과 군사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무척 무서웠을 것입니다. 죽기살기로 버티었지만 결국 46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명나라의 성리학으로 하루해가 뜨고 , 하루해가 지는, 실리보다는 명분이 중요했던 조선의 왕과 선비들의 고집은 결국 나라를 망가트렸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