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는 왕릉이 2기가 있습니다. 태조원비 신의왕후의 제릉(齊陵)과 태조의 둘째아들인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厚陵)이 있습니다. 이번 Page에서는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厚陵)에 대해서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문화재청 조선왕릉 사이트에서 자료사진을 구해서 꾸며 보았습니다



후릉은 1412년(태종 12)에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 김씨가 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해풍군 백마산 동쪽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가. 이후 1419년(세종 1)에 정종이 노상왕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20년(세종 2)에 정안왕후의 능 옆에 능을 조성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아주 오래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데, 쌍릉으로 되어 있고, 석물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건물들(정자각, 수라간,수복방)은 소실되어서 그런지 안 보입니다. 또한 어디에 홍살문이 있었는지 진입로는 어디였는지 재실의 자리는 어디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 상설도를 보면 능침 주위 석물 배치도를 보면 마치 태종의 헌릉을 보는것 같습니다. 다른 릉과 달리 문석인과, 무석인이 석마를 포함하여 두배로 많습니다.


▼ 제2대 국왕 정종의 가계도 입니다만, 후궁과 후손들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정종은 3대 태종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공석이나 마찬가지가 된 왕좌를  임시로 거쳐갔던 왕이었며, 한양서 개경으로 천도를 하였고, 2년만에 왕위를 태종 에게 넘겨 주었습니다.그 후 1421년(세종 1)에 인덕궁 정침에서 6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능의 역사

1412년(태종 12)에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 김씨가 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해풍군 백마산 동쪽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1419년(세종 1)에 정종이 노상왕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20년(세종 2)에 정안왕후의 능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정종(定宗) 이야기

정종(재세 : 1357년 음력 7월 1일 ~ 1419년 음력 9월 26일, 재위 : 1398년 음력 9월 5일 ~ 1400년 음력 11월 13일)은 태조와 신의고황후 한씨의 둘째 아들로 1357년(고려 공민왕 6년)에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태조를 도와 왜구를 정벌한 공으로 군부판서, 상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자 왕의 아들로 영안군(永安君)에 책봉되었고 의흥친군위 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로 왕세자로 책봉된 후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수도를 개성으로 다시 천도하였고, 왕족, 권신 등이 기르던 사병을 폐지하여 삼군부에 편입시켰다. 또 집현전을 설치하고, 한양의 5부에 각각 학당을 설립하였다. 이후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박포의 난)으로 동생 정안군(태종)을 왕세자로 책봉시킨 후 바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상왕이 된 후 인덕궁에서 생활하였으며, 1418년에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노상왕이 되었다. 그 후 1421년(세종 1)에 인덕궁 정침에서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후 묘호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묘호를 올리지 않았고 명나라에서 내린 공정왕(恭靖王)이라는 시호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에 묘호를 정종이라 올렸다.(인덕궁은 현재 정확한 위치는 모름)

정안왕후(定安王后) 이야기

정안왕후 김씨(재세 : 1355년 1월 9일 ~ 1412년 음력 6월 25일)은 본관이 경주인 월성부원군 김천서와 삼한국대부인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1398년에 영안군(정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덕빈)에 책봉되었고,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덕비)로 책봉되었다. 정종 사이에서는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1400년에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가 되었다. 그 후 1412년(태종 12)에 인덕궁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 정종의 릉을 옆에서 보는 자료사진인데, 능침으로만 볼때는 왕릉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주변 건물들도 없고, 산야에는 나무도 없어, 허전하고, 쓸쓸한 후릉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능침 오른쪽의 첫번째 문인석이 안보입니다.



▼ 능의 왼쪽에서 바라보는 모습인데, 아마도 능 아래가 저수지인 모양입니다. 아마도 재실은 수몰된것은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보면 앞에 보이는 문인석옆에 다른 문인석이 있아야 하는데, 안 보입니다.



▼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이 있었던 자리였는지 기둥 받침석이 보입니다. 하지만 월대가 없이 낮은 지대에 정자각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 능침의 왼쪽 문인석입니다. 그런데 석마들의 주둥이는 전부 떨어져 나갔습니다.



▼ 무인석의 모습을 보면, 남한의 왕릉의 무인석 보다는 대체로 세밀함이 덜합니다. 석마는 누가 일부러 그랬는지 주등이가 전부 떨어져 나갔습니다.



▼ 뒤에서 보는 무인석의 모습입니다. 왕릉에서도 무인석은 문인석 보다 한 걸음 뒤에 세워져 있습니다



▼ 망주석은 높지도 않지만 세밀하게 기교를 부리지 않고 투박한 모양 입니다.



▼ 장명등은 능침마다 하나씩 넣여져 있는데 언뜻 봐서는 장명등이라고 보기 어려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장명등의 양식인듯 합니다



▼ 석양의 모습은 그나마 봐줄만 한데, 석호의 모습은 딱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 능침의 봉분을 보호하는 난간석은 대부분 없어졌고, 난간석주만 세워져 있습니다




▼ 다른릉과 달리 병풍석과 인석을 받치고 있는 돌이 보이는데, 처음 보는 돌입니다.



▼ 인석의 모양이 볼품이 없어 보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석물들의 상태는 대단히 위태해 보입니다.



▼ 봉분의 평풍석은 화려하게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대대적인 보수가 시급해 보입니다. 에~고... 분단국이라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 표석의 전면인데, 후면의 자료사진은 못구했습니다만, 음기(번역)자료는 구해서 올렸습니다.

묘표(점면) : 조선국 정종대왕 후릉 정안왕후부좌

묘표(후면) :
 정종 공정 의문 장무 온인 순효 대왕은 원나라 지정17년인 정유년(공민왕6, 1357) 7월 1일에 탄생하였다. 처음에는 영안군에 봉해졌는데 명나라 홍무 31년인 무인년(태조7, 1398)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9월에 왕위를 물려받았다가 건문 2년인 경진년(정종2, 1400) 11월에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영락 17년인 기해년(세종1, 1419) 9월 26일에 승하하여 경자년(1420) 정월 3일에 풍덕 동쪽 흥교동 계좌(북북동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재위가 2년이고 상왕으로 있은 것이 20년이며 향년은 63세이다. 명나라에서 ‘공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 순덕 온명 장의 정안왕후 김씨는 지정 15년인 을미년(공민왕4, 1355) 정월 9일에 탄생하였다. 홍무 31년인 무인년(태조7, 1398)에 덕빈으로 책봉되었다가 이윽고 덕비로 봉작이 올랐다. 영락 10년인 임진년(태종2, 1412) 6월 25일에 승하하여 8월 8일에 정종대왕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향년은 58세이다.
숭정 기원후 128년인 을해년(영조31, 1755) 2월 ○일에 세우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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