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봉의산 기슭에서 소양강을 굽어 보는 소양정(昭陽亭)은 보기 드물게 거대하고 하려 하게 앉아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중층 누각의 주심포집에 팔작지붕이 얹힌 구조입니다. 

 

소양정의 원래 이름은 이요루(二樂樓)였는데, 조선 인조 25년(1647년)에 춘천부사 엄황이 정자를 수리하면서 소양정(昭陽亭)이라고 하였으니, 조선인조 이전에 이미 증층누각이 아닌 단층 정자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목조건물 특성상 쉽게 썩거나, 화재등으로 수없이 수리하거나 새로 지었을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단층 정자가 아닌  증층누각이므로 소양루(昭陽樓)라고 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소양정으로 오르는 길옆에는 춘천의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던 각종 공적비들을 모아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비석들은 주로 누구누구 선정비 또는 영세불망비라고 새겼는데, 내용은 치세에 고맙다고 세운 비석들입니다.

 

고을의 현감들은 대개 임기가 보통 1년 ~ 2년 정도이므로 고을에서는 떠나는 현감들의 선정비를 세우는 백성들도 참 힘들었겠다 싶은데, 간혹 질이 좋지 않은 현감이나 관찰사등이 부임하면 은근히 부호들을 괴롭힐 때가 있는데, 돈 좀 있는 부호들은 재빨리 선정비를 크게 미리 세워서 관리들의 환심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선정비에 이름과 직함이 적인 현감, 관찰사등이 모두 선정을 베풀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는데, 돈이나 챙기고 괴롭히며 떠난 관리들의 선정비는 백성들이 길바닦에 부숴버리고 지나다니면서 밟고 다녔다고 합니다.

 

▼ 선정비군에서 보면 특이한 비가 있는데, 친일파 "이범익 영세불망비" 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탄신기념비가 있습니다

 

▼ "강원도지사 이범익 화려한 "영세불망비" 입니다. 뒤에 이범익 단죄문이 보입니다.

 

▼ 춘천시에서는 이례적으로 친일파 이범익의 영세불망비를 비석군의 제일 뒷자리에 안치하였는데, 내부적으로 비석을 부서 버려야 하나, 보존해야 하나, 고민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민에 대한 결론은 이범익에 대한 이력을 상세하게 단죄문으로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하던 독립군을 토벌하고 "간도특설대"를 창설했던 놈이 이범익, 조선놈이었다니... 해방이 된지 80년이 되었지만, 독립투쟁 하던 분들은 나쁜 놈이 되었고, 친일민족반역자들은 대를 이어서 고위관직에 국회의원, 교수등이 돼서 친일행위는 정당했다고 하면서, 총 들고 일본군들을 죽였다는 독립군들을 핍박하는 그들의 천하가 된 지금의 대한민국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역사를 잊은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 간도특설대는 이범익이 주도 하여 1938년에 만주국에서 창설되었으며 소수의 일본인 장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병과 지휘장교들은 조선인 지원군이었습니다., 부대의 규모는 대략 800~900명(대대급) 정도였고, 조선인 장교는 150여명이었습니다.

 

간도특설대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백일, 백선엽, 강재호 송석하, 김범준, 신현준, 김홍준등이 있습니다

 

▼ 스마트폰으로 보면 안 보여서 글을 옮겨보았습니다

친일파 이범익 단죄문
조선시대 관리들의 공덕비를 모아놓은 이 비석군에는 일제 강점기 대표 친일파인 이범익(李範益)의 비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비석은 그가 강원도지사로 재임하던 1934년 3월에 세워졌다.

이 단죄문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강원도민의 뜻을 모아 광복 68주년을 기념하며 세웠다.

이범익은 1883년 10월 15일 충북 단양에서 태어났다. 일제 식민통치에 적극협력하는 가운데 1912년~1913년 춘천군수를, 1929년 11월~1935년 3월까지 강원도지사를 지냈다. 

특히 강원도지사 재임 전후로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앞장서 옹호하였으며, 여러 번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1937년에는 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그 해 11월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성장(省長)에 임명되었다. 

1938년 9월에는 그의 제안으로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가 창설되었다. 간도특설대는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 172명을 살해하였으며, 그밖에 많은 사람을 체포, 강간, 약탈, 고문한 부대이다. 1942년 5월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조선인 최대의 감격, 영예 완수에 최선을 다하자” 라는 환영담화를 발표하였다. 

광복후인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그해 8월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의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후 6.25 전쟁 중 1950년 8월 납북되었다.

이범익의 친일행적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같은 해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보고서>에 낱낱이 드러나 있다.

2013년 8월 15일

이범익단죄문설치추진위원회

 

▼ 친일민족반역자 이범익(출처는 나무위키)이며, 일본식 이름이 "키요하라 노리마스",  또는 "키요하라 노리에키"나 "키요하라 한에키"등으로 여러개의 이름이 자료에 있습니다. 

 

 

▼ 이범익이 창설한 간도특설대이며 일본군 부대에서 근무중 지원한 조선인들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이범익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인을 잡도록 하였으며, 이들은 대부분 해방후에 국군에 스며들었다가, 6.25전쟁으로 인하여 영웅이 되기도 하였습니다.(출처 나무위키)


▼ "이승만대통령각하 제81회탄신기념", 그런데 한문시를 4 글자씩  8 행시를 지어서 새겼습니다. 참 대단한 충성심입니다

 

▼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탄생 81회 기념으로 우표발행, 송수기념탑을 세웠습니다


▼ 비석군 오른쪽에 소양정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으며, 잠깐이면 올라갑니다.

 

▼ 길 중간즈음에 오래된 비석이 보이는데, "춘천절기 전계심묘비"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왜 여기에 묘비가 있지?...묘비명은 ""春技桂心旬節之墳( 춘기계심순절지분)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깨진 부분은 총탄자국으로 보입니다.

 

원래는 묘와 함께 소강1교 앞 봉의산 기슭에 있었다고 하며, 도로가 생기면서 묘는 없어지고, 묘비만 지금의 자리에 옮겨왔다고 합니다.

 

▼ 비석의 뒷면에 빼곡히 한문이 각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이 비의 뒷면에는 "절기전성계심명소잉모천적교방...(節妓全姓桂心名少仍母賤籍敎坊...)" 라고 시작되는 계심의 행적이 한자로 음각되어 있으며, 1796(정조20) 5월에 , 박종정(錦城 朴宗正) 짓고, 류상륜(文化 柳尙綸) 썼다는 내용입니다.

 

▼ 잠깐이면 소양정에 올라갑니다.

 

▼ 지금의 소양정은 6.25 전쟁 때 불에 타버리자 봉의산 기슭에 터를 닦고 1966년에 터를 옮겨 새로 지은 것입니다

 

▼ 힘찬 소양정(昭陽亭)의 글씨는 14대 강원도지사 박경원(재임:1963.12~1969.02)씨의 글씨입니다. 

 

▼ 소양정에서 소양강을 바라보면 강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정자라는 것이 산과, 물과 바위등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 기본적인 요소인데 물이 전혀 안 보이니 갑갑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양정이 원래는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소양 1교 강가의 가파른 곳에 있었는데,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이 되며,  6.25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966년에 터를 옮겨서 봉의산 기슭에 새로 지었은데, 원래의 단층인 정자가 아닌, 증층의 누각으로 한층 멋을 더해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소양정(昭陽亭)이 아닌 소양루(昭陽樓)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 포털지도서비스에서 (구) 소양정터와 현재의 소양정의 위치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강물이 굽이치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던 (구) 소양정(이요로)은 아마도 고구려나 백제, 신라시대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기록에도 홍수로 인한 유실로 여러 번 새로 짓고, 보수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까지 유실과 보수를 거듭하다가 한국전쟁을 겪으며 완전히 소실되었는데, 도로 확장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현실에 결국 터를 옮겨서  봉의산 중턱인 현 위치에 재건되었습니다. 현재 소양정 옛터는 이미 자전거도로에 묻혀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현재의 소양정 자리는 6.25 때(6.25~6.26) 공산군(2사단)이 장갑차를 앞세워 제1소양교를 도하하려 할 때, 효과적으로 저지시킨 공병대(6사단)의 미친 활약이 있었던 전쟁 전적지이기도 합니다


※ 자료시진은 e뮤지엄, 춘천시청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자료사진으로 (구) 소양정을 보겠습니다(일제강점기 1920년대로 추정)

 

▼ 소양정 엽서에서 날자를 보면 4년 10월 1일로 되어 있는데, 4년은 소화 4년 즉 1929년이므로 이때 까지도 소양정 뒤로는 도로가 없었습니다.

 

 

▼ 1930년대로 추정되는 사진에는 소양정 뒤로 도로가 개설된 듯합니다. 아마도 이런 상태로 6.25 전쟁 때까지 소양정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 소양교(1교)는 1933년에 준공되었습니다. 소양정 뒤로 도로가 보입니다. 6.25 때 이 소양교에서 국군 6사단 공병대는 보병을 대신해서  2일간 공산군을 막아냈습니다

 


▼ [자료사진:강원도] 1966년에 터를 옮겨 새오 지은 소양정의 모습인데, 이때는 나무가 없어서 소양교와 강물이 잘 보입니다.

 

6.25때 이 자리에서 국군 6사단 공병대(1중대)는 미친 활약으로 공산군을 공격하여 공산군의 시체가 다리 위에 쌓였을 정도로 개박살 냈습니다.

 

6.25 직후 서쪽 옥산포(서상리 근처)에서 국군에게 신나게 얻어터지고, 소양교(1교)에서 장갑차와 자주포만 믿고, 다리를 건너려다가 공병대의 조준사격에 공산군은 무수한 시체만 남기고, 2일 동안 오도 가도 못하였습니다

 

공산군은 춘천에 직빵으로 들어가려면 다른 다리는 없고 소양교뿐이었으므로 꼭 확보해야만 했으므로 무조건 돌격으로 대들다가 전문보병도 아닌 공병대 1개 중대에 개박살 났습니다.

 

현재의 소양정에서 소양 1교 북쪽까지의 거리가 약 500m 정도 되므로 개인화기의 유효사거리에 들어 오므로 충분히 사격을 해서 적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소양정 자리는 국군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준 잊어서는 안 되는 격전의 현장입니다

 

▼ [자료:춘천시] 소양 2교에서 보는 소양정이며, 강에 둑을 쌓은 모습을 보니 1970년대로 보입니다

 

 

▼ 내부에는 여러 문인들의 시와 글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김시습, 김상헌, 정약용 등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인물을 포함하여 춘천을 찾았던 문인들 대부분이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어떻게 저런 귀중한 현판들이 6.25 때 불타지 않고 잘 보존이 되었는지 참으로 다행 중의 다행입니다.

 

▼ 공병중대 전적지, 즉 지금의 소양정 자리가 되겠습니다. 보통 소양교전투라고 합니다

 

▼ 소양교(소양1교)전투의 흔적이며, 교각에 중기관총 탄환자국이 무수히 박혀 있습니다(강원도민일보에서 인용)

 

▼ 소양정에서 바라보는 소양 2교 

- 여기까지입니다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