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활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철도는 언제 조선에 들어왔을까?, 궁금해서 이런저런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철도 부설권에 대한 일부 내용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조선정부에서 철도가 처음으로 구상되었던 것은 수백 년 간 수운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것보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철도를 이용해서 물자를 수송하고, 사람들을 나르는 것을 보고, 조선에서도 항구에서 경성으로 물자를 대량으로 실어 나르는 수단인 철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 근대의 철도부설의 역사를 간단하게 알아보았습니다.
▼ 우리나라(조선) 철도의 역사를 그림으로 보겠습니다(외교부 홈피)
※ 자료는 매일건설신문의 "[기획칼럼]손길신 前 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자료는 인천일보,경인일보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자료는 위키백과,나무위키, e-뮤지엄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매일건설신문의 "[기획칼럼]손길신 前 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항을 발췌하여 보았습니다
“조선정부가 최초 부설 하려던 철도는 경인철도가 아닌 경부선 철도였다.” 한국철도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한국의 철도가 처음부터 일제에 의하여 계획되고 부설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_손길신 前 철도박물관장 |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철도 부설과 운영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친일파들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고종을 압박하고, 강제로 협약을 맺은 다음에 철도(경인선)를 부설하고 경제침략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서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매일건설신문의 "기획칼럼"을 보면, 조선의 철도를 부설하려던 계획은 처음에는 대한제국의 조정에서 부산과 한성(경성)을 잇는 경부선을 계획하였지만, 일본의 사주를 받은 받은 정병하(재정대신)가 재정상황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극렬히 반대하여 미국에 주려던 경부선 부설권이 무산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본도 처음에는 경부선을 계획하고, 조선정부를 압박하여 철도 부설권을 가져가려 하였지만, 서구 여러 나라들의 압박에 결국 철도 부설권을 포기하였지만, 결국에는 일본 특유의 교활함과 조선정부의 목을 쥐고 있던 힘을 이용하여 미국인이 공사 중이던 경인선의 부설권을 인수하여, 조선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을 완공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정부가 철도를 깔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기 전부터 이미 조선땅에 철도를 깔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철도 부설을 위해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일을 벌이고 있었는가는 철도 부설 지역에 대한 사전 탐사 작업을 통해 알 수 있다. 1885년 1월 일본은 마츠다 코조(松田行藏)라는 일본인 기사를 보내 사전에 철도 부설 지형을 탐사하도록 하였다. 그는 약 4년 동안 국경 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세, 교통 및 경제 상황 전반을 세밀하게 조사하였다. 그에 이어 철도국 장관의 추천으로 들어온 카와노 텐즈이(河野天瑞)는 조선 조정의 협조 아래 부산에서부터 탐사를 하였다. 이 두 사람에 의해 일본은 1892년에 조선에서의 철도 부설에 관한 상세한 도면을 작성할 수 있었는데, 이들이 탐사한 거리는 모두 240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우리역사넷 |
▼ 그 당시 일본은 경부선 철도 부설권은 당연히 일본이 갖는 것으로 확신하고 철도 노선 계획을 위한 조선땅의 예비 측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1892년 사냥꾼으로 변장하고 대구에서 철도노선 측량을 떠나는 일본인 측량대)
※ 일본인들은 이미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20여 년 전부터 조선의 지리를 샅샅이 조사한 것으로 보이며, 1894년의 동학혁명 때 일본군들은 농민군들과 전투 시에는 조선인이 아니면 모르는 샛길도 훤히 알고 있어서 길목에 매복하여 공격하였으므로 동학군들이 크게 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조선에서 철도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 조선에 철도라는 것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1876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김기수"이며, 요코하마에서 도쿄까지 증기기관차를 타고 그 소감을 '일동기유'에 소개하였습니다만, 대략적인 상황만 기록하고, 상세한 내용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1883년에는 한성순보에서 외국신문의 철도 관련 기사를 번역해 신문에 실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이 일본에서 철도이용 경험을 통한 철도부설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였으나, 조선정부에 공식적으로 최초 철도부설을 건의한 사람은 주미 조선 대리공사 이하영(李夏榮;친일 반민족행위자)이었습니다.
이하영은 1888년 주차미국전권대신서리로 발령을 받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갈 때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갔는데, 그는 기차에 큰 관심을 보여, 1889년 귀국할 때, 철도 부설 등 이권에 관심을 가진 미국 정부가 구해준 열차모형을 갖고 귀국한 후, 궁중에서 보여주면서 철도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건의하게 되었습니다
이하영이 조선정부에 모형기차를 보여주면서 철도 부설을 건의한 4년 후 고종 29년(1892년 4월 12일)의 기록을 보면 조선정부가 일본이 아닌 미국인 사업가 '모어스'와 계약한 경성-부산 간 철도 부설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舊韓國外交文書 第10卷 美案 993號) - 고종 29년 (1892년 4월 12일) |
경부간 철도를 부설하기 위하여 미국인「모어스」를 초청하여 이완용, 이하영과 함께 부설조건을 협의하게 한 바 그 가운데에는 부설자금을「모어스」가 출자하여 조설한 후 25년 내로 자금을 회수할 것과「모어스」에게 5개 금광개설권을 주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병하 등이 극력 반대하여 마침내 철도 부설을 중지하게 되어「모어스(James R. Morse)」가 미국공사에게 말하여 이 날 미국공사가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묵에게 조회하여「모어스」의 왕래여비 및 폐업손해 등 합계 10,000원의 배상을 요구하다 |
※ 1892년 미국인 사업가 모어스와 철도부설허가에 대한 협약을 맺을 당시 외무대신은 이완용이었으며, 그때는 친일파로 변절하기전에는 친미파였는데, 모어스로부터 상당한 로비자금을 받고, 경인철도부설에 적극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 1890년대 당시 10,000원은 쌀 2500 가마니(80kg)
※ 조선정부의 철도부설 계획을 좌절시킨 정병하(鄭秉夏, 1849~1896,47세)는 친일파로서 조선은 경부선 철도부설에 대한 재정이 부족하다면서 극렬히 반대하여 결국 미국인 '모아스'의 철도 부설계획을 무산시켰는데, 일본의 사주를 받아, 조선정부가 발주하고, 미국인에 의한 철도 부설을 방해하였습니다.
조선정부 최초의 철도 부설을 좌절시킨 정병하(鄭秉夏)는 고종과 민비의 신임을 받아 왕실 재정을 맡았던 자이며,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들이 궁궐 안으로 침입하였을 때, 민비에게는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였으며, 고종에게는 임금이 먼저 단발의 시범을 보여야 된다고 강요하여 고종의 머리카락을 직접 잘랐던 자로, 아관파천 후 김홍집과 함께 역적으로 몰려 피살되고, 군중들에 의해 찢겨진 시신이 종로에 버려진 친일파였습니다. |
※ 조선정부는 미국인 '모아스'와의 경부선 철도 부설계획이 좌절된 이후에도 철도부설의 꿈을 버리지 않고, 1894년 6월 28일 의정부 공무아문(工務衙門) 산하에 철도부설을 담당할 철도국을 설치하였으며 이어서, 1896년 3월 29일 미국인 모어스(Morse)에게 경인선(경성~인천) 철도 부설을 허가함으로써 배상금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제임스 모어스(James. R. Morse)_미국인 사업가_철도산업정보센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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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 경인철도 부설권을 알렌에게 넘겨받음. 이듬해 3월 22일 인천 우각현에서 경인철도의 기공식을 거행 일본에 체류 중 1891년 우리나라 통정대부가 되고 대변조선상무위원에 임명되어 미국 뉴욕에 특파되었다. 주미 참찬관으로 있던 이완용을 설득하여 고종의 허락을 얻어 우리나라에 철도부설을 하려고 입국했다. 주한 미공사의 막후 교섭으로 이완용과 철도창조조약을 체결했으나 당시 조야에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커서 고종은 이완용에게 철로개변회담을 중지케 하였다. 이렇게 되자 모스는 왕복 여비와 기타조로 은 1만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였으나 우리나라에 이 보상 능력이 없어 다시 1896년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이어 운산금광채국권을 획득했다. 이듬해 3월 22일 인천 우각현에서 경인철도의 기공식을 거 행하고 본국에 돌아가 자금을 조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일본인의 경인철도인수조합에 부설권을 양도하였다. |
▼ 경인철도를 부설하게 된 제임즈 모어스 일행들의 단체사진인데, 가운데가 모어스(추정)이며, 미국인들, 조선인들, 청나라사람들은 통역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정부는 경인선 철도 부설의 조건으로 1892년 경부철도 부설협의 때와 같이 철도 부설자금은 모어스(Morse)가 부담하여 완공하고, 15년간 운영 후에는 조선정부가 매수하기로 하였으며, 만약 조선정부가 매수를 못할 시 특허권을 10년간씩 연장한다는 조건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때 조선정부는 1896년 7월 15일 칙령 31호로 반포한 국내철도규칙에서 궤간을 미국의 1,435㎜으로 확정함으로써 당시 왕명으로 지금의 철도국제표준궤간을 채택하였습니다.
※ 하지만 일본은 경인선 철도 부설권이 미국에 확정되었지만, 조선은 물론 미국의 투자가에게 '모어스'의 자금난이 심각하여 경인선의 철도를 완성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리면서, 경인선의 부설권을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이미 조선을 통제하고 있었던 일본은 조선의 부산과 경성을 잇는 철도를 통하여 이권과 경제침략을 목적으로 철도 부설권을 얻고자 1894년 8월 무단으로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조선 정부가 철도부설에 대하여 재정적 여유가 없으므로 일본 정부에서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를 부설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 - 1894년 8월 |
제1조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권고하며 조선 정부는 이러한 권고를 수용한다. 제2조 경부선 및 경인선을 부설하는 것을 권하지만 현재 조선 정부의 재정이 부족하고 일본과 합동하는 것도 어려우므로 계획을 세워 이후에 조속히 시행한다. 제3조 경성과 부산, 경성과 인천 사이에 일본이 설치한 군용 전신선을 그대로 유지한다. 제4조 통상을 위해 전라도 연해 지방에 통상 항구 한 곳을 연다. 제5조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할 때 조선군과 일본군의 충돌을 우연한 사건으로 규정하며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 제6조 일본이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확립하도록 돕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두 나라 정부가 논의하여 정한다. 제7조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는 일본군을 적당한 시기에 철병한다. |
하지만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이익독점을 우려한 미국을 비롯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등의 영향력에 의해 1896년(고종 33) 3월 29일 경인성의 철도부설권은 미국인 모스 (Morse, J. R.) 에게 넘어갔고, 1년 후인 1897년 3월 22일 오전 9시 우각현(牛角峴, 지금의 도원역 부근)에서 서둘러 기공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 조선정부가 미국인 모스와 체결한 계약에는 특허일로부터 12개월 내에 기공, 그 후 3년 안에 준공하며, 이를 위반할 시 특허의 효력이 상실된다고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계약 만료일 1주일 전에 1897년 3월 22일에 서둘러서 쇠뿔고개에서 기공식을 열었던 것입니다
또한 철도 부설자금은 모어스(Morse)가 부담하여 완공하고, 15년간 운영 후에는 조선정부가 매수하기로 하였으며,
만약 조선정부가 매수를 못할 시 특허권을 10년간씩 연장한다는 조건을 포함시켰습니다.
▼ 경인선의 철도부설허가를 증명하는 "철도창설조약서"입니다(자세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 1897년 3월 22일 쇠뿔고개(우각현)에서 미국인들과 조선인 인부들을 모아 놓고 경인선 착공식을 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제임스 모어스로 추정됩니다.
※ 그런데 제물포(인천)에서 출발하는 철도의 기공식을 왜(?) 쇠뿔고개(우각현)에서 했을까... 자료를 종합해 보면, 결국은 일본인들 때문이었습니다
기공식은 보통 출발역이나 종착역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처음 계획된 인천역 부지가 일본인 주지들의 몽니 때문에 토지보상 문제로 매수가 어렵게 되자 '철도창설조약'에서 공사시작은 1년이라는 조항에 따라서 7일밖에 남아 있지 않은 기일이 촉박하게 다가오자, 철도 부설권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노선을 제물포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변경하고 서둘러서 쇠뿔고개에서 착공식을 치르고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자료그림(인천시청)에서 보면 인천신사에서 쇠뿔고개역(우각동역)으로 철도노선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인 지주들의 비협조로 부득이 인천역 축현역-> 쇠뿔고개로 이어지는 노선을 채택하였습니다.
만약 일본인 지주들이 적극적 협조로 토지를 확보하였다면, 지금의 동인천역(축현역)은 없었을 것입니다
※ 우각동역은 1906년 4월 폐지되었습니다.
▼ 원래 경인선의 계획은 제물포에서 노량진까지 7개 역이었습니다만, 2차 부설권을 가진 일본인들에 의해 경성까지 연장개통 되었습니다.
▼ 자료사진으로 경인선 공사사진을 몇 장 보겠습니다.
※ 경인선의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부들(사진의 출처는 경인일보입니다)
▼ 사진 중앙에 있는 사람은 조선인 순검(지금의 경찰)으로 보입니다
▼ 경인선의 토목공사 중인데, 이때는 미국의 모어스가 공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_e-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공사용 기관차가 투입되었습니다.
▼ 분기기 구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인천역으로 추정이 됩니다.
▼ 노량진에서 용산까지 한강에 교각을 세우는 공사 중입니다. 멀리 보이는 남산이 보입니다. 한강철교는 미국인 사업가 모어스에 의해서 교각이 2개까지 완성된 상태에서 일본인에 철도부설사업권이 일본인에게 양도되었습니다.
※ 한강철교는 1900년 7월 8일에 완성되었습니다.
▼ 1896년에 공사중인 한강철교의 모습이며, 일본인회사에 경인철도부설권이 넘어가기 2년전에 이미 미국의 모어스는 한강철교를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 경인선의 한강철교(1900.7.5), 한강철교일부는 미국인 모어스에 의해 건설되었고, 나머지는 일본인회사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모어스가 미국으로부터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지자 일본(경인철도인수조합)은 조선 정부를 무시한 채 불법적으로 모어스와 경인철도양도계약(京仁鐵道讓渡契約)을 체결하고 1898년 12월 17일 모스에게 사정 가격 170만 2천원(엔)을 지불함으로써 경인철도의 부설권은 일본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경인철도 부설권은 일본에게 넘어갔지만, 제반 설계규격, 자재등은 이미 주문이 끝난후였으므로, 미국제로 시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체공사기간 30개월중 이미 25개월이 지났으며, 경인선의 토목공사는 절반정도 진행되었으며, 한강철교의 교각도 3개나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이후 일본은 경인선 부설권을 인수한 후 1899년 4월 23일 두 번째 기공식을 제물포(인천역)에서 가졌습니다.
▼ 경인선의 부설권을 인수한 일본은 공사를 급속히 진행시켜 부설권을 인수한 후 거의 9개월 만인 1899년 9월 18일에는 제물포(인천) - 노량진 간 33.8km 구간의 철도를 개통하였습니다
일본인의 합자회사인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가 9개월에 철도를 개통한 것은 이미 모어스의 미국인들이 철도의 토목공사(노반공사)를 완료하고 철로(Rail)만 깔면 되었기에 짧은 시간에 일본들이 경인선(노량진까지)을 개통하게 된 것입니다
▼ 인천역에서 성대한 개통식을 하고 있는 일본인들과 구경하는 조선인들이며, 앞의 섬은 월미도입니다.
철도의 날 |
- 원래는 경인선이 개통된 1899년 9월 18일이 철도의 날이었습니다. - 현재는 1894년 6월 28일로 변경되었습니다 ※ 2018년 5월 8일 국무회의(문재인정부)에서 일본인에 의한 철도 개통일이 아닌, 의정부 공무아문(工務衙門)의 철도국이 조직된 날로 변경되었습니다. (공무아문(工務衙門)은 갑오개혁기에 교통, 체신, 건축, 광산 등의 사무를 관장하던 중앙관청이며, 일본세력으로 일으킨 갑오정변 세력들이 만든 철도국 조직일은 정통성이 있고, 일본인들이 개통시킨 경인선의 개통일의 철도의 날은 정통성이 없다는 것은 좀 설득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
▼ 경인선의 종합지표(대한민국역사박물관)
▼ 경인선 개통당시의 인천역의 모습과, 완전개통 후 엽서로 발생된 사진을 구해 보았습니다.
▼ 1907년의 인천역
▼ 경인선 1차 개통(제물포-노량진) 시에는 7개 역에 정차하였습니다.
※ 경인선 개통 당시 최초의 열차는 미국 브룩스사의 ‘모갈(mogul)’형 탱크 증기 기관차였습니다. 하루 상·하행 각 1회씩 총 7개의 역을 달렸고 4대의 증기기관차와 승객이 타는 객차는 황실전용 1칸을 포함해 6칸이 있었다 합니다
화물을 싣는 화차는 28칸이 있었습니다.-현대로뎀
▼ 제물포역(인천역)에서 미국인, 일본인, 조선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데, 개통식 때 찍은 사진일 수도 있겠습니다
▼ 당시 경인선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모갈)와 객차의 모습이며, 객차는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모갈 증기기관차는 350마력에 최고 속도는 55km였으며, 평균 운행속도는 20~22km였습니다. 미국 BROOKS에서 1899년에 제작하였고 총 4대가 경인선에 투입되었습니다
▼ 측면에 'S. &. C. R. R.'이라는 영문약자와 'SEOUL-CHEMULPO'라는 글씨가 씌어있는데, 영문약자는 경인철도 운영사인 경인철도합자회사(Seoul & Chemulpo Rail Road)를 뜻하며, 'SEOUL-CHEMULPO'라는 것은 당시의 경성역과 제물포역이라고 하는 경인철도의 시종착역을 표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출처 : 인천일보)
▼ 경인선의 기념레일이며, '1897'의 숫자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 객차는 3개의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1등석의 요금은(1원 34전), 2등석은(66전), 3등석은 (33전)이었으며, 1등석은 주로 외국인들, 2등석은 주로 조선인, 3등석은 주로 일본들인 많이 이용했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은 허접한 3등석을 이용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통계입니다
▼ 경인선 개통당시 모갈형 증기기관차에 일본기와 미국기를 같이 걸고,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 명치 32년 7월은 1899년 7월이 되겠습니다.
▼ 경인선에서 운행 중이던 증기기관차(모갈)가 인천정거장역(제물포정거장)에 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
▼ 경인선에 탑승하는 조선인들(1900년대)
▼ 경인선 개통당시 축현정거장
▼ 경인선 개통당시 소사정거장
▼ 1920년대 경인선의 어느 정거장의 모습이며, 인천부근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출처:인천광역시)
▼ 어느 정거장인지는 모르겠으나, 모갈 증기기관차에 물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 1900년 9월 5일 부터 영등포정거장과 용산정거장이 정식으로 여객 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경인철도 1차 개통 시에는 현재의 영등포역을 "노량진가정거장"이라고 하고 영업을 하였다고 합니다.
1900년 9월 1일 부터 노량진가정거장을 정식으로 영등포정거장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 경인선의 용산정거장(1900년)이며, 개통당시에는 간이역 수준이었습니다만, 일본군이 제물포에서 기차를 타고 용산에 주둔하게 되면서, 용산정거장을 유럽식으로 거대하게 다시 지었습니다.
▼ 용산역 구내의 모습이라는 사진설명이 있는 헤르만산더 사진집에 있는 사진 중 하나입니다
이 사진은 일본주재 독일영사관 무관이었던 헤르만 산더 일행중 일본인 사진사가 찍은 사진이며, 헤르만 산더는 1906년 9월(1차), 1907년 3월(2차) 두 번 조선을 방문하였으므로, 그 시기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멀리 좌측에는 인왕산, 중앙에는 북한산이 보이네요!!!
헤르만 산더가 남겨준 사진을 보면 대체로 사진의 질이 상당히 좋은데, 헤르만산더가 조선과 만주를 둘러볼때 동행한 일본인 사진사의 실력이 꽤 좋았었던 모양입니다.
경인선은 노량진과 제물포(현재 인천역)를 잇는 33㎞ 가 부분 개통되며 운행이 시작됐습니다. 1년 뒤인 1900년 7월 8일 일본인 소유의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가 남대문역(현재 서울역)까지 총길이 42㎞의 전 구간을 개통시켰습니다
돛단배, 가마, 말을 이용하면 반나절(12시간) 동안 이동해야 하는 거리지만 경인선의 철도는 시속 약 20㎞의 속도로 한 시간 반 만에 노량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경인선은 1897년에 착공되어 1899년 인천-노량진 구간이 1차로 개통되었고, 한강철교가 완성될 때까지 1년을 기다려 1900년 10월 경성역까지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당시 경인철도 노선도를 보면 한강 북쪽에는 용산역과 남대문역, 경성역이 있었습니다.
▼ 경인선의 개통당시에는 경성에 2개의 정거장이 생겼는데, 지금의 서울역인 "남대문정거장"과 1km 서쪽으로 "경성정거장"입니다.
※ 원래 경성역은 서대문 앞에 있었습니다.
※ 경성역(경인선)이 서대문 밖에 있었던 이유는 대한제국의 정치 중심지였던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에는 남대문정거장은 경성정거장에 비해서 허름하고 규모도 10평 정도 작아서 간이역 정도 크기였는데,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국권을 빼앗기게 되자, 경성정거장(후에 서대문정거장) 주위의 유럽외교관들이 본국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대신 남대문역 주변에 일본인들이 많아지자, 남대문정거장은 일본인들로 붐비게 되었습니다
이에 일본 조선총독부는 경성정거장(서대문역)을 1919년 폐지하고 대신 남대문정거장을 경성역(1923년)으로 변경하고, 대대작인 공사를 진행하여 3년 만인 1925년 지금의 서울역사(구 서울역)를 준공하였습니다
※ 경인선의 남대문정거장(지금의 서울역)과 경성정거장(구 서대문정거장)의 명칭변경이력을 정리하였습니다 1) 1900년 11월 12일 남대문정거장, 경성정거장 신설(경인선 2차 개통) 2) 1905년 4월 11일 경성정거장을 서대문정거장으로 변경 3) 1919년 3월 31일 서대문정거장(구 경성역)을 폐지(3.1운동이 서대문정거장 앞에서 벌어지자 조선총독부는 역을 폐지) 4) 1923년 1월 1일 남대문정거장을 '경성역'으로 변경하고 르네상스 양식으로 신축공사 시작 5) 1925년 10월 25일 신축 경성역 완공 6) 1946년 1월 1일 경성역을 서울역으로 명칭변경 |
▼ 경인선의 승차권이며, 앞면은 한문, 뒷면은 영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 당시 외국인들이 이용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승차권을 자세히 보면, 남대문정거장. 경성정거장의 이름이 보입니다.
▼ 경인선 2차 개통당시의 남대문정거장(지금의 서울역)
▼ 경인선의 남대문정거장(지금의 서울역)
▼ 1900년 경인선 경성정거장(서대문정거장) 모습이며, 3.1 운동을 정거장 앞에서 하였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는 1919년 3월 31일에 정거장을 없애버렸습니다.
▼ 서대문정거장이며, 1919년 3월31일에 정거장은 조선총독부가 없애버렸습니다.
※ 이 사진은 일본주재 독일영사관 무관이었던 헤르만 산더 일행 중 일본인 사진사가 찍은 사진이며, 헤르만 산더는 1906년 9월(1차), 1907년 3월(2차) 두 번 조선을 방문하였으므로, 그 시기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 경인선의 최종완공을 축하하며 일본의 경부철도합자회사의 관계자들(1900.11.12)-경성정거장(서대문정거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 조선총독부는 경인선 2차 개통(1900.11.12)의 축하엽서를 발생하였습니다
※ 경인선을 처음에는 회사이름을 따서 ‘경인철도’라고 불리다가 일본으로의 국유화가 진행된 1906년 이후부터 ‘경인선’으로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 경인선은 제물포(인천)에서 경성까지였으나, 경부선이 개통되는 1905년 1월 1일 이후에는 제물포(인천)에서 노량진까지만 경인선이 되었습니다
※ 일본군들이 제물포까지 배를 타고 와서 경인선을 타고 경성까지 이동하는 등 일본이 그토록 바라던 조선의 식민지를 향한 첫길을 따라서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는 길을 만들게 되는 역사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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